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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 44:18~34
제목: 창 F4: Bridge Focus 유다

본문 창세기 44:18~34

18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19
이전에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21
주께서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22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3
주께서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24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25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해설 및 연구/묵상_오감성경사역연구원 김성찬 목사

창세기 후반부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38장에 나온 유다의 비위사건이다. 37장의 내용과 39장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에 전혀 관련성 없어 보이는 듯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배치나 전체적인 흐름을 두고 본다면 창세기 38장에 등장하는 유다의 이야기가 창세기 후반부 내용에 중요한 부분인 것을 짐작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중심엔 유다가 있는데, 왜 창세기 후반부에서 유다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야곱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난 유다는 29장에서 붙여진 이름의 의미를 소개한 다음, 창세기 37장에 등장한다. 요셉을 팔아넘겨버리자는 무지막지한 제안을 한 사람이 유다이다. 한 편 에서는 요셉을 구덩이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책략이었다고 하는데,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 억측이랄 수밖에 없다. 놀라운 것은, 유다가 ‘제안’을 했을 때, 다른 형제들이 다른 의견을 내거나 반대를 하거나 하지 않고 유다가 하자는 대로 했다는 것이다. 형제들 사이에서 상당한 신뢰와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는 대목이다. 여하튼, 유다의 의견대로 요셉은 팔려간다. 어쩌면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것이 아니라 유다가 넘겼다 해도 과장된 것은 아니겠다.

그렇게 요셉을 판 후,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위장조치를 한 형제들은, 요셉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통곡을 하고, 그 모습을 형제들이 본다. 요셉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해를 당하였다면, ‘너희들은 괜찮으냐!’ 정도 물어봐 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엔 아무이야기도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자기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의견대로 요셉이 팔아치워졌지만 죽은 줄 알고 있는 그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한 다른 아들들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야곱을 보며 유다는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보단 집을 나서게 된다. 실망을 했을 수도 있고,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아버지에겐 오직, 요셉과 베냐민 뿐이라는 것이 자기 눈앞에 현실로 확인된 것이기 때문이리라!

집을 나간 유다! 가출이라면 가출이다. 유다가 형제들을 떠나 이방 사람과 교제하며 가정을 꾸리게 된다. 성경 38장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전개대로 유다는 세 아들을 낳고 어느덧 장남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럴 수가! 우리가 알다시피 두 아들을 잃게 된다. 엘, 오난을 잃고서야 깊이 무엇인가 깨닫게 된 유다! 무엇을 깨달았을까! 바로, 아들을 잃어버린 아비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 것이다. 막내 셀라마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며느리를 잠시 돌려보내지만, 며느리 다말은 그럴 수 없었다. 당시 풍습 상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친정으로 가게 되면 여자로서의 취급은 물론 홀대가 확연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말의 지략으로 유다를 통해 쌍둥이를 낳는다. 엘, 오난을 잃어버린 대신에 베레스와 세라! 유다는 비록 아들을 잃었으나 두 아들을 주심으로 얼마간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비위로 인해 일어난 것일지라도 그마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유다는 아들을 잃어버린 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야곱이 요셉을 잃고 통독하며 마음을 놓아 버렸던 것을 보며 서운한 마음과 원망마저 가졌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것이 얼마나 철부지 같았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 사실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유다의 마음은 그저 매일같이 속죄하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38장에서 시간이 흐른 후, 39장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세기 38장의 이야기가 최소 20년의 간극을 가지고 전개되는 동안 39장의 이야기도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이 총리가 되는 과정과 총리가 되어 풍년 7년을 보내고 흉년 2년 째, 야곱에게 닥친 기근은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요소로 작용한다.

흉년 2년 째, 요셉이 총리가 된지 9년이 되는 때, 요셉과 형제들은 대면하게 된다. 물론 요셉만 알아 볼 뿐, 베냐민을 제외한 형제들의 면면을 확인한 요셉은 그의 동생, 베냐민의 신변을 확인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시므온은 볼모로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것을 두고 복귀중인 유다 일행은, 그 자체로 야곱에게 충격을 준다. 농담 같지만, 형제들이 몰려서 움직이기만 하면 꼭 한 명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시므온이 없어 진 줄 알았으나 자초지종을 들은 야곱은 한 번 더 절망한다. 창세기 42장 38절에 그 내용이 잘 나와 있는데, 야곱은 요셉에 이어 그의 유일한 형제 베냐민까지 형제들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총리와 약속한 것은 어길 수 없고... 야곱의 완고함이 형제들의 비행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베냐민을 놓아줄 수 없는 마음! 그 때, 유다의 활약이 돋보인다.

창세기 43장 3~5절이다.
3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르우벤이 이야기 했을 때에는 아무 반응 없던 야곱이었다. 그러나 유다가 나서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반응을 한다. 처음엔 격정적인 반응이었고, 원인과 결과 중심으로 원망같은 책망을 하는 야곱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한 마디를 더한 유다의 이 말에 야곱은 순응한다.

창세기 43장 8~10절.
8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야곱과 유다는 아들을 잃어본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다. 두 부자만이 공감 할 수 있는 ‘아비의 마음’ 이라는 것이 흐른다. 유다가 처음에는 야곱에게 그냥 이야기 했을지 몰라도, 여기서는 다른 분위기다. 야곱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비의 마음으로 다가서는 유다의 간곡함에 야곱도 마음을 돌이킨다. 유다가 직접 담보가 되겠다는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는 부분이겠으나 르우벤이 자기의 두 아들을 담보하겠다는 것과는 격이 다른 이야기다. 그렇게 시므온을 제외한 유다 일행은 요셉 앞에 다시 서게 된다.

은잔으로 베냐민을 형제들에게서 떼어놓고자 한 요셉의 계략에 말려든 유다 일행! 그들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베냐민은 더더욱 놀랐을 것이다. 항변할 수도, 누구를 원망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성경이 형제들을 이야기 할 때, ‘유다가 그의 형제들’ 이라는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유다가 형제들 사이에 상당한 위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절망 속에 있는 형제를 대신하여 유다가 이야기 한다.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창 44:14)’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은, 베냐민 없이 복귀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인 것을 유다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의 항변에도 상관없이 상황은 더 심각해지고 만다. 총리는 그를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더욱 간절하게 이야기 한다.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대목이다. 아들을 잃어버린 아비의 마음이 무엇인지 안 유다는, 그 아비의 마음으로 총리에게 이야기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8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19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21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22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3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24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25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여기서도 유다는 자신이 볼모가 되겠으니 베냐민을 놓아주라는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을 보인다. 유다가 앞서서 이야기한 이 이야기를 듣는 요셉은 격동하여 한 참을 울고 나서야 자신이 요셉인 것을 밝혔다. 드라마 같은 장면이다. 요셉은 귀가하는 형제들에게 의전차량(?)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에게 요셉의 상황을 이야기 하고 야곱은 고센으로 옮긴다. 그리고 이주 후, 요셉과의 연락망으로 유다가 사용된다(창 46:28~34). 형제들 사이는 물론이고 요셉과 아버지 야곱 사이를 이어주는 핵심적 가교역할을 한 사람이 유다이다. 유다의 활약으로 온 가족이 만날 수 있었고, 한 가족인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야곱은 유다의 이런 마음을 헤아렸을 것이다. 이는 그를 축복하는 대목으로 알 수 있다. 창세기 49장 8~12절이다.

8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9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10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1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12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다른 형제들이 누릴 수 없는 풍요로움과 번성, 심지어 왕권에 대한 축복은 유다의 이름 그대로의 성취이다. 유다를 통해 야곱의 인생 황혼기에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를 보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기도 할 것이다. 놀라운 것은, 야곱의 축복대로 유다의 자손에게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리 놓는 역할,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는 자로서의 가장 본형을 보여준 사람, 유다! 그의 아품이 곧 야곱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었으며 야곱이 돌이킬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너진 야곱의 가정을 세워주고 견고하게 하며 참된 연합과 일치를 이끌어 낸, 너무나도 귀한 일을 감당하였다. 그래서 유다를 Bridge Focus 라고 하였다. 얼마나 귀한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단절된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세상 속의 단절된 관계들을 회복하고 이어주는 다리 놓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

진행시나리오

[활동] 캠프 초청자 작정하기
[준비물] 작정서/기도카드
[진행내용]
다리 놓는 역할을 감당하여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복을 누릴 수 있었던 유다의 삶을 따라 캠프(성경학교/수련회)에 초대 할 친구를 작정하고 이름을 넣어 기도하며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분반나눔

분반나눔시 주의사항

다그치듯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 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점검하고 짚어주는 시간이며 활동한 내용을 통해 말씀에 대한 이해와 반응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배운 것을 작게라도 활동에 참여한 후에 나눔을 한 것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감정과 느낌을 이야기 하게 됩니다. 짧게 한 마디 하더라도 최대한 칭찬과 격려로 나눔을 이끌어 가시기 바랍니다. 나눔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진행가능하며 유동적으로 접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점검 및 활동내용 소감 나눔] → [말씀을 바탕으로 한 일주일의 각오] → [암송구절 제창] → [축복 기도 후 해산]

1. 자, 다같이 오늘의 본문과 제목이 어떻게 되지?
2. 창세기를 이루는 두 기둥은? ‘B4', 'F4'
3. 창세기를 이루는 두 기중에서 B4와 F4 네 가지는 뭐지? ‘창조’, ‘타락’, ‘심판’, ‘분산’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4. 오늘 우리가 살펴 본 사람은 누구인지 이야기 해보고, 소개를 해봅니다.
5. 최근, 친구사이를 화해시켰다거나 자기를 통해서 좋아지고 달라진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6. 유다의 다리 놓는 역할처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꿈과 비전, 소원을 통해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어떤 식으로 다리 놓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7. 이번 주, 머릿속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고 마무리 하자!

창세기 49:10 암송순서 묵상포인트(관계묵상)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 골격보기
첫째주절: 이르리니
둘째주절: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2. 살붙이기
① 어떤 백성이 복종합니까?
→ 모든
② 모든 백성이 누구에게 복종합니까?
→ 그에게
③ 언제까지 이른다고 합니까?
→ 실로가 오시기까지
④ 무엇이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까?
→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3. 전체암송

1. 모든 백성이 유다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야곱은 유다에 대해서 유언합니다. 통치자가 유다의 후손에서 나오고, 백성들은 그에게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자손들에게 남길 유언은 무엇입니까?










 

#오감성경사역연구원 미디어팀 입니다.

 

본문 : 창세기 47:22~26

제목 : 창세기 F4(믿음의 사람) 요셉

 

본문

22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암송

창 50:24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1. 골격보기
첫째주절: 요셉이 이르되
둘째주절: 나는 죽을 것이나
셋째주절: 하나님이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 살붙이기
① 요셉이 누구에게 말합니까?
→ 그의 형제들에게
② 하나님이 어디에 이르게 하신다 하십니까?
→ 맹세하신 땅에
③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신 땅입니 까?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④ 하나님이 어떻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십니까?
→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3. 전체암송

1. 하나님이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고백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실 수 있듯이 오늘도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인도해주십니다.









 

해설 및 연구/묵상_오감성경사역연구원 김성찬 목사

 

흔히 요셉을 이야기 할 때, 꿈을 다룬다. 꿈을 가지고 있었고, 해석도 할 수 있었던 사람이기에 그를 꿈쟁이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 그 꿈이 계시록에서도 성취가 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요셉을 꿈꾸는 사람이라고만 하기엔 부족하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으로 이어온 언약의 계대를 이어받은 사람으로 그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언약의 확장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 꿈들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여기서는 이런 관점으로 그의 삶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간단하게 살펴 볼 것이지만 그의 삶을 정리하고 헤아리기엔 충분 할 것이다.

유력한 가문의 11번째 아들인 요셉! 그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형 부를 이룬 사람으로 역대 선조들과는 다르게 많은 부인과 자녀를 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자신을 향한 각별한 애정과 돌봄은 다른 형제들과 눈에 띄게 다른 부분이었고 도드라지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런 요셉은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의 꿈을 꾸기까지 한다. 이것은 오히려 형제들 속에 있는 시기심을 더욱 더 고취케 하는 부작용을 일으킨다(창 37:5~11).

출처 : 위키피디아

불행이다. 부모와의 사랑의 관계가 다른 형제들과 동등한 관계로 결속된 가족의 분위기라면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소개된 대로 단 한 번으로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도약대 역할을 한 것이라면 상당히 억지스럽기 까지 하다. 이것을 야곱이 이삭의 죽음1)을 맞은 후 그가 초래한 비극의 씨앗이라 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면에 보이지 않는 야곱의 요셉/베냐민 편력으로 인한 편애로 당한 상처는, 다른 자녀들 입장으로 해석 될 수 있는 충분한 불만과 아쉬움을 제공하기에 이른다.

1) 성경에 이르면, 이삭은 180세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창 36:28). 요셉이 그의 나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갔고(창 37:2), 그로부터 13년 후 애굽의 총리가 된다(41:46). 그 후 7년의 풍년을 지나 흉년 2년이 지났을 때, 야곱은 식솔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주한다. 그 때 야곱은 130세였다. 결국, 야곱과 요셉이 헤어진지 22년 만에 만난 것이 된다. 이것을 역으로 계산하면, 야곱이 요셉과 헤어졌을 때의 나이가 108세다. 이 때, 이삭이 살아 있었다.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으므로 이삭의 168세 때,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린 슬픔을 이삭도 같이 겪었다는 뜻이 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조금만 헤아리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이삭도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을 적어도 12년 간 함께 했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은, 표현되지 않았을 지라도 더듬어 알면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의 표현은 우리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 동참하시는 것임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연적인 알고리즘으로 야곱의 삶 다음에 다루어져야 할 정도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겠으나 성경은 과감함 생력과 전개로 느닷없이 요셉을 등장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정착한 후, 가족의 일상이 어떤 분위기인지 충분히 눈치 챌 만큼의 정보는 제공한다. 그리고 요셉의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지 알 수 있도록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요셉을 이야기 하며 그것이 곧 한 사건을 일으키는 복선의 역할을 하게 한다. 약 100km 떨어진 곳에 심부름을 보낸다. 하루에 8시간 동안 걷기로 이동한다고 했을 때, 최대 도달거리를 감안하면 최소 3일이 걸리는 거리다. 이삭이 농사로 정착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유목을 유지하며 가계를 이은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양을 치러 그 멀리 떨어진 곳까지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물론, 건기엔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분위기로 추정해 볼 때, 이 시기는 건기일 것이므로 기후조건이 상당히 열악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기꺼이 아버지의 말에 따라 형들에게로 간다. 가는 길을 따져보면 광야를 지나야 하고 골짜기를 가로질러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야곱의 심부름을 성실히 행하는 요셉을 이야기 해준다. 그 심부름이 비극 중의 비극을 초래 할 줄은 아무도 예측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어디 있을까! 돌아올 때가 아닌데 돌아와 한다는 것이 요셉의 옷을 야곱에게 보여주었고 심부름을 보낸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야곱에게 주어진 것은, 형들의 소식이 아닌 피가 묻은 요셉의 옷 조각 뿐 이었다. 절규에 절규를, 절망에 절망을 앉은 야곱은 주저 않아 버리게 된다.

요셉에겐 날벼락이다. 그래도 형제들이고 한 아버지를 둔 자식들 아닌가!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혹독한 현실이었다.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것이 화근이었을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저 겁만 주려 했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단 말인가! 저항에 발버둥을 쳤을 것인데 노예로 끌려가기 까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온갖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그런 그가 ‘상황’을 ‘뜻’으로 인지하고 순응하게 된 것이 언제쯤인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보통 15일 정도의 이동거리를 감안한다면, 약 2주 동안에 인생이 완전 달라진 생각의 전환적인 인도함이 있지 않았다면 노예의 신분이 된 그 자체에 메시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꿈을 통해 22년을 버티도록 만드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성경은 자세하게 소개하고는 있지 않지만, 요셉 그 자신에게 일어난 격변적인 이 일을 수용하는 어떤 전환적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대목이다.

요셉이 아버지 곁에 있을 때는 몰랐을 ‘경험’ 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자집의 유력자로 자란 그가 노예가 되었을 때, 그에게 주어진 생소한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경험은 온실 안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애굽에서 가정총무로 신임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일 처리의 명민함을 보였다면, 야곱이 요셉에게 시킨 교육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뭐 이것이 흐름을 바꾸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한 결과는 의외로 고무적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은 요셉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전부의 표현이다. 극찬이다. 엄청난 것이다.

야곱이 형인 에서를 피해 벧엘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하신 언약의 집약적 표현, 바로 ‘함께하심’ 이다. 그 함께 하심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야곱의 삶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조금 다르다.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심지어 팔려간 신세이며 노예인 그에게 ‘형통한 자’라고 하신다. 우리의 사고와 완전 다르다. 소유와 더 많은 것의 누림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 = 형통’ 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할 정도로 아주 격찬을 아끼지 않는 표현이다. 요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이다.

심지어 감옥에 가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어 ‘형통’함 가운데 살게 하신다. 자본주의 사고로 납득도 안되고 논리적으로 이해도 안되지만, 성경은 격정적인 사건을 두고 아주 덤덤하게 ‘요셉은 형통한 자란다! 봐라~ 하나님이 함께하시잖아!’ 라는 식으로 의식을 깨워주고 있다.

형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로 보았으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다. 우리는 그를 꿈쟁이라고 보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를 형통한 자라 하신다. 애굽 사람은 그를 노예로 보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고 계셨다. 야곱의 사랑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 되어 지금도 함께 하시는 분으로 고백되고 있다. 즉, 상황이 달라져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확신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 그는 곧 형통함 가운데 있는 자라 하겠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성도인 것이다. 비록 납득되고 이해되었을 때, 그리고 최소 조건 이상의 소유가 타인의 평가로 인정될 때, 우리는 ‘잘 되었다!’는 표현으로 형통을 가늠하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아니올시다!

중간에 요셉이 총리가 되고 형들을 만나게 되어 아버지와 극적인 상봉을 이루는 이야기는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라 생략한다. 다만, 후반부에 총리가 되어 흉년의 연차가 더해질수록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전역이 기근에 시달릴 그의 나이 40대에 이르는 어간 쯤, 성경은 그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지 기록하고 있다. 즉, 남은 흉년 4~5년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편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다. 당시의 유력인사들이 요셉 앞에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고, 주변국의 대외 인사들은 요셉의 승인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부모와 자기들이 요셉에게 고개를 숙인 것으로 해석하여 격분하였지만(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더 들여다보면 야곱의 형제국인 에돔과 그의 부족국가들이 요셉에게 절을 하며 원조를 구했을 것을 감안하면 꿈의 적용은 가솔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요셉의 꿈을 소개하고 그 이후에 요셉의 삶을 소개한 성경기자의 탁월함에 고개를 숙여지는 부분이다. 단순히 꿈을 해석하고 대안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하며 자기의 이야기 한 바를 이룬 요셉을 보면, 한 번 말씀하신 하나님은 결코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 없이 성취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사 말씀하신 바가 나에게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이...! 그래서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가 지금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겠다.

야곱은 감동했다. 감격했을 것이며 감탄까지 했을 것이다. 어지간한 지역을 다니며 다양한 문명을 접했지만 애굽은 처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인생 중에 별로 새로울 것도 없을 것이겠지만, 그에게 펼쳐진 노년의 평안함은 약속 하신 그대로 성취 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 그 자체이다. 그래서였을까! 야곱이 축복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받은 복은 장자가 누릴 그 이상의 복이다. 그리고 요셉에게 행한 축복은 넘치고 넘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잠깐 요셉이 받은 축복의 내용을 소개해 본다.

창 49:22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3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26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야곱도 본 것이다. 떨어져 있었지만, 그 시간동안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하시듯, 요셉에게도 함께 하셨었다는 것을 본 것이다. 그래서 감격한 것이고 그의 유언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그에게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가! (‘요셉’이 들어가는 부분에 자신의 이름으로 Self-Blessing 해보자! 그리고 마지막엔 일생의 가장 큰 ‘아멘’으로 결언하자!)

아브라함이 ‘예배자의 자부심’으로, 이삭이 ‘너그러움과 인내’로, 야곱이 ‘약속을 기억함’으로 정리 할 수 있는 인생이라면,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정리되는 삶이다. 세상 끝 날 까지 예배자의 자부심으로 세상을 대할 때, 너그러움과 하늘의 소망을 가진 인내로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바이다.

진행시나리오

 

[활동] I ‘이집트의 왕자 2’ 시청
[준비물] ‘이집트의 왕자 2’ Video
[진행내용]
요셉을 다룬 후, 이집트의 왕자 2를 시청합니다. 편집본을 만들어 주요 부분만 보아도 좋습니다.
주어진 시간 내에 끝까지 보기 힘들 것이므로 주요 부분만 편집하여 보여주고 별도의 시간을 내어 끝가지 시청하는 것을 권합니다.

[활동] 야곱의 축복 II 재현하기
[준비물] 창 49:22~26 / 야곱의 축복 악보
[진행내용]
창세기 49장의 내용으로 서로서로를 축복하고 노래로 Free-HUG로 축복합니다.

분반나눔

 

분반나눔시 주의사항

다그치듯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 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점검하고 짚어주는 시간이며 활동한 내용을 통해 말씀에 대한 이해와 반응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배운 것을 작게라도 활동에 참여한 후에 나눔을 한 것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감정과 느낌을 이야기 하게 됩니다. 짧게 한 마디 하더라도 최대한 칭찬과 격려로 나눔을 이끌어 가시기 바랍니다. 나눔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진행가능하며 유동적으로 접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점검 및 활동내용 소감 나눔] → [말씀을 바탕으로 한 일주일의 각오] → [암송구절 제창] → [축복 기도 후 해산]

1. 자, 다같이 오늘의 본문과 제목이 어떻게 되지?

2. 창세기를 이루는 두 기둥은? ‘B4', 'F4'

3. 창세기를 이루는 두 기중에서 B4와 F4 네 가지는 뭐지?

‘창조’, ‘타락’, ‘심판’, ‘분산’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4.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듣고 가장 기억나는 점은?

5. 최근에 겪은 가장 억울한 일과 그에 대한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그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깨달았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아이들이 억울한 일이 없다고 이야기 할 것을 대비하여 드는 예)

예시 1. 시험공부를 엄청 열심히 했는데, 다음 날 코피가 나서 답안지를 다 버렸다!

예시 2. 게임(대전신, 불멸의 전사 2, 천군, 강철이 제왕 등)을 완전 열심히 해서 거의 최고 수준을 찍었는데 와이파이가 갑자기 끊겼다!(요즘은 무선연결 없이도 많이 하긴 하던데...)

예시 3. 동생이 울고 있을 때, 부모님이 오셔서 갑자기 막 혼내시면서 다그치신다.

6.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장 최근에 느낀 적은 언제인가? 그리고 기억하자! 하나님이 함께 하심 = 형통 이라는 것을!

7. 이번 주, 머릿속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고 마무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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