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3:20-25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암 우리 가운데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형제 자매 여러분, 부디 이 권면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권유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짤막하게 썼습니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풀여나온 것을 알려드립니다.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게 여러분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지도자와 성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게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https://youtu.be/7aO4SfEDut8?si=GFpUyW-jx0FbIBfN

히브리서의 마지막 메시지는 구원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구원은 성경에서 가장 큰 은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종교의 최종 목적은 구원입니다. 죽어봐야 알거나, 신의 선택에 달린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점은 기독교는 구원이 출발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죽기전에 알아야하고 구원의 확신은 인생에서의 자유를 준다. 언약의 틀에서 구원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의 구원을 은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후서 1:12

그리고 이 구원은 우리가 살면서 계속해서 기억해야하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히브리서 13:20

히브리서 13:20절에서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수식하는 평화는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원수된 죄인들과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로마서 5:10

죄로인한 원수의 결과는 죽음이다 하지만 원수의 관계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화평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3:20절에서 이야기하는 영원한 언약의 피로 인함이고 기독교의 영원한 복인 것이다. 하지만 언약에는 반드시 피가 꼭 존재한다.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창세기 15:10

갈데아 우르를 떠난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한 것이 75세이다. 자식을 주시고 이 땅을 차지하고 번성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브람은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세울지 하나님에게 물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의 모레처럼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이야기 하셨다. 그러자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을지를 물었다.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10절과 같이 이야기하셨다. 아브람은 언약을 세우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해가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바로 그 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창세기 15:17-18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은 바로 그 날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대시대의 언약에 대한 의식은 주군과 가신 사이에 채결되는 경우가 많았고 주로 가신이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으로 쪼갠 짐승사이를 지나가는 것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창세기 15:17-18절에서의 언약식에서는 약속의 주체인 하나님이 쪼갠 짐승사이를 지나갔다. 이는 이 언약이 파기되는 경우 하나님께서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즉, 아브람의 불순종도 하나님이 책임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브람은 보기 좋게 이 언약을 어긴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이후 예수님의 피를 통해 아브람의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지시게 된다.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고린도전서 11:25

너의 죄로 인해 내가 죽는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었기 때문에 언약이 파기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불의함을 긍휼히 여기겠고,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히브리서 8:12

이것이 바로 언약 복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13:20절에서 하나님이 위대한 목자가 되는 것이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약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은혜는 언약을 통해 주어진 은혜와 구원에 감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안에 거하며 순종의 선한일을 해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바로 내가 죽는 삶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으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히브리서 13:16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https://youtu.be/Fa-OY1q5DJA?si=d5pkfm9IXJcosOXy

히브리서의 후반의 주된 내용은 어떻게 살 것인가 즉, 행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행함은 다른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에 이르는 조건이기 때문에 중요하기 이야기하지만 기독교는 구원이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이는 은혜라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다. 에배소서 2:8절에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을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10

그렇다면 행함은 기독교에서 어떤 의미인가? 에베소서 2:10절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서 성경은 선행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히 13:16절에서도 '가진 것을 나눠주는' 이라는 의미에 비춰봤을 때 가진 것의 일부는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돌아가도록 나에게 주어진 것을 사용하는 것은 '선순환'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선순환을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선을 행한다는 것은 대상이 기쁘고, 하나님도 기쁘고, 나도 기쁘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내주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와 예배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삶의 예배는 삶 가운데 선한 일을 통해서 기쁨의 예배가 된다. 이것이 로마서 12:1절에서 이야기하는 예배이다.

나눔의 선한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변의 지체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다. 먼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가난의 정의는 배고픈데 먹을 것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0

바울이 이야기하는 가난을 기억해 달라고 표현한 것은 지금까지 바울이 해왔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은 가는을 돕는 것도 힘들다. 돕는데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앙의 경제원리는 넉넉하게 나누는 것이다.

남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더욱 부유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물을 주면, 자신도 갈즐을 면한다.
곡식을 저장하여 두기만 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그 것을 내어 파는 사람에게는 복이 돌아온다.
좋은 일을 애써 찾으면 은총을 받지만, 나쁜 일을 애써 추구하면 나쁜 것을 되 받는다.
잠언 11:24-27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
잠언 19::17

왜 가난이 존재하는 가?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보면 사람의 죄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을 돕는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주변의 지체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풍성함'으로 돌아온다. 공동체가 아름다워지고 정이 생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35

히브리서 13:14-15

(새번역)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개역개정)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https://youtu.be/L8qROvKG65k?si=7f4NqQd36vwmRbl1

인간의 핵심은 '마음'이다. 마음은 크게 생각과 느낌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생각은 어떠한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고 느낌은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마음의 상태를 긍정과 부정의 스펙트럼으로 펼쳐보면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는 평강, 만족, 감사와 같은 행복의 상태와 우울, 두려움, 불안과 같은 불행의 상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 이끄실까? 당연히 '행복'의 상태로 이끄신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평강과 하나님의 영광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평강과 하나님의 영광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강의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상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평강의 너희에게 주노라' 였다. 따라서 평강과 영광은 믿음이라는 연결통로를 통해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강과 믿음과 영광은 셋트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는 '평강'(믿음/영광)의 상태에 있을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평강은 그 종류와 차원이 다르다. 믿음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강하다면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이 그 반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주중 생활에서 평강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바로 마음의 근심이나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3:14)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다. 따라서 영원한 도시인 천국을 찾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City of God'에서의 도시는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질적인 도시였고 일시적이며, 세상적인, 결국에는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견고하고 영원하며, 궁극적인 도시를 찾아야 하는데 이런 도시를 찾는 사람의 특징은 지나가는 즐거움에 매달리지 않고 '믿음'안에서 진리에 헌신한다. 현재 관심과 걱정에 매몰되지 않고 하늘에 사는 사람의 믿음 상태가 바로 영광의 상태이고 이는 선순환을 이룬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복음 7:38)

마음에 소망의 가치가 채워졌을 때 비로소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믿음의 선순환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히브리서 13:15)

믿음의 선순환이 왜 막히는가? 마음의 중심이 세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육신과 세상의 가치중에서 마음의 중심에 무엇을 두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가지고 있느냐, 소유하고 있느냐의 차이이다. 예를들어 아담은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보다 밖에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자 했다. 이것이 바뀌는 것을 바로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죄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잠언 4:23)

신앙인은 소유하면 안되는가? 아니다 가져도 된다.

아브람은 이집트를 떠나서, 네겝으로 올라갔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서, 모든 소유를 가지고 이집트를 떠났다. 조카 롯도 그와 함게 갔다 아브람은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다. (창세기 13:1-2)

여기서 아브람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중에 소유로 발전한 것이 바로 '이삭'인 것이다. 아브람은 그로 인해 맏음과 평강이 그의 마음에서 사라졌다. 창세기 22장 1절에 '너의 사랑하는 외아들'이라는 표현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3일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의 중심이 바뀌게 되고 결국에는 믿음을 완성하여 평강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처럼 소유욕은 평강의 상태를 깨뜨리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만든다. 소유욕에는 여러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첫번째는 '자기중심성'이다. 이득의 증가를 좋아하지만 반대는 견디지 못한다. 전도서 3장 9절에도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라고 이야기하면서 소유욕으로 안달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유욕의 두번재 특징은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노력을 해야한다는 강박이다. 잠언 16:1에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소유욕을 채우기위해 사람은 좋은 결과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28절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 소유욕이 클수록 세상에 흔들리게 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신앙도 약해지게 된다.

그렇다면 소유욕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3)

마음이 가난하다의 뜻은 소유욕을 내려놓은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반대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채우심을 기다리는 상태를 말한다.

 

히브리서 13:9-13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음식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이 튼튼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튼튼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 규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제단에 놓은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립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리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개역개정)

 

https://youtu.be/BZtq5TQTepw?si=dTMVD2CcN4BjdyyI

  1. 복음의 정체성을 소유하라

안식교의 음식법에서 겔로그의 시리얼(채식주의 식단의 보완)이 탄생했을 만큼 안식교에서는 음식법이 중요하다. 하지만 음식법에 메이게 된다면 삶에서 신앙의 잘못된 태도를 가질 수 있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교만과 같은 율법주의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경계해야 할 점이다.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음식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이 튼튼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튼튼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 규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13:9

본문 9절의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은 유대교의 음식법에 대한 이야기인데 특별히 이를 통해 '거룩'과 구별된 삶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일상이 거룩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 데리고 나온 주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레위기 11:45

신약시대에 와서는 음식법을 지키지 않았다. 음식법은 '거룩'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음식법은 일종의 자전거의 보조바퀴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는 본질(거룩)을 알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거룩의 본질을 알게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음식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음식법을 계속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외에도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거룩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음식법을 포함한 율법을 지킴으로 이것이 '선민의식'으로 발전한다면 이것은 교만이라 할 수 있고, 죄악된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즉, 율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높이고 자존감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나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거룩'이 아니라 바로 복음 즉, '은혜'인 것이다.(히 13:10)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요한복음 6:55-56

진정한 구약의 음식법의 성취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복음의 정체성을 드러내라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립시다.(히브리서 13:11) 대속죄물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림(부정함을 상징)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바로 진정한 속죄의식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3:12)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속죄로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림으로 완성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히브리서 13:13) 예수님의 고난은 '치욕' = 모욕 + 조롱 ; 우리도 그와 같은 치욕을 짊어지자. 믿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자고 이야기한다. 현대에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기독교인의 참된 삶에는 고난과 칭찬이 함께 드러난다. 기독교인으로써의 삶에서 칭찬만 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감내한다면 복음에 대한 정체성은 드러나게 되어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마태복음 5: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 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상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요한복음 12:42-3

삶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믿음인 것이다.

히브리서 13:7-8, 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어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게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젠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개역개정)

 

https://youtu.be/Yu_32FhZAvA?si=qq95Uk6n00Ky9ULT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매일 고민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진리를 듣고 삶에 적용하는 것으로 삶은 그 자체가 은혜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장로를 지칭되는데 여기에는 목사도 포함된다. 장로는 크게 가르치는 장로, 다스리는 장로로 구분된다. 대개 가르치는 장로, 목사는 풀타임으로 사역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스리는 장로는 현업에서 일을 하면서 겸하여 섬긴다. 목양의 입장에서는 둘다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벧 5:5에는 장로에게 순복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5 (개역개정)

 

히 13:7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득의 믿음을 본받으라

히브리서 13:7

 

세상에서 때로는 가족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객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는 교회보다 중요한 공동체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는 영원성을 다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서의 지도자는 중요한 자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가르치는 장로의 경우는 진리를 전한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게 생각해야 하며, 진리가 오염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한다.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때로는 나의 이익을 위해 타협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사람이 싫어할 것 같은 진리를 전해야 하는 부담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10 (개역개정)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야하고 하나님의 뜻이 선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면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하면 안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교회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은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왜 중요한가? 생명과 평강을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선택에서 안전한 방향을 선택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은 다 죽음으로 향해 가는 것이 세상이다. 진정한 의미의 평강과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공급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1. 지도자를 기억하라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히브리서 13:7 (새번역)

 

지도자를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의 수고를 생각하고 감사한다는 뜻이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삶에서 역지사지가 100% 되는 것은 아니다. 육아, 직장생활, 수고를 기억하도록 감사하도록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왜 교회지도자의 수고를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첫번째로 교회지도자도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교회지도자가 제일 힘들다. 성도들도 직장을 다니는데 왜 목회자가 힘든가? 목회가 힘든 이유는 많은 것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은 기준이 분명하다. 손익계산으로 분명하다. 하지만 목회는 그렇지 않다.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 교회 지도자는 내면과 외면이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은 내적상태와 관계없이 일을 수행하면 된다. 운동선수나 음악가들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과 잠자는 시간을 제어한다. 목회자도 그러한 심정으로 살아간다.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진리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지도자의 수고를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인정와 격려를 필요로한다. 이러한 표현은 작더라도 큰 격려와 위로가 되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갈라디아서 6:6 (개역개정)

 

  1. 지도자의 믿음을 본 받으라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히브리서 13:7 (새번역)

당시 지도자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의 결과는 바로 순교였고, 천국이었다. 복음으로 제시되는 선물은 천국에 가는 것이다.

 

 

2. 지도자에게 복종하라

히브리서의 13:7절의 본받으라는 말은 곧이 듣고 복종하라는 이야기이다. 한국교회에서의 가장 안 좋은 모습은 사심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성경을 말씀을 오용해서 순종을 강요하고 복종하게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자식이 물려받다는 이야기로 세습을 이어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사유재산이 아니다. 내가 하는 행실이 옳더라도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사도바울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목회자의 성경적인 권위와 가르침에 복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성경적인 가르침과 명령은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다.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다. 구별이 필요하다. 목회자도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도 성도들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잘 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성도는 권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이다.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을 장차 보고드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3:1 (새번역)

 

가르치는 사람 - 지도자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게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3:17 (새번역)

 

17절 후반에 기쁜 마음으로 탄식하지 않도록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탄식은 고통가운데 나오는 한 숨인데 목회자의 탄식은 은혜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중용의 원리가 적용된다. 목회자들 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탄식하는 목회자, 반대로 너무 많이 받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목회자는 목회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번외로 목회자는 언제 탄식하는가?

예배시간이 시작되었을 때 예배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보았을 때, 성도간의 사랑과 의리를 저버리고 분쟁할 때, 성도의 헌금생활과 같은 성도의 생활이 잘 되지 않을 때

 

교회는 사람이 궁극적인 지도자이면 그 공동체는 희망이 없다. 궁극적인 교회의 지도자는 예수님이다.

 

히브리서 13:5-6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끔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새번역)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는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오 하노라

(개역개정)

 

https://youtu.be/6Xs374TLoT8?si=1NQ92_1kZxmFxc7q

돈은 삶과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그렇다면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성경에서는 돈으로 미래를 성실히 준비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개미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돈은 겨울철의 난로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난로와는 적정거리가 필요하다. 이처럼 우리에게 돈도 그렇게 적정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돈을 너무 가까이 한다는 것은 사람의 모든 노력, 희생, 수고의 기준이 '돈'이 되는 경우이다. 사람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돈'이 된다면 그 사람은 돈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돈'을 삶의 정체정과 삶의 가치를 측정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세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돈'을 사랑한다는데 있다. 인류 역사에서도 가장 큰 우상은 바로 '돈'이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던 이스라엘은 바로 풍요와 다산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데 큰 죄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돈'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1. 돈을 사랑하는 이유
  • 육체적으로는 생존과 연관되어 있고, 더 많이 가지면 누릴 수 있다. 일을 안해도 되고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 돈은 정신적으로 '산소'와 같다. 왜냐하면 '돈'을 가지면 숨통이 트이고,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쇼핑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돈'은 빛과 같은 역할을 한다. '돈'을 가지면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돈이 있으면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 하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의 종교성을 통해 하나님 이외에 실제적, 실용적으로 대체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돈'은 하나님과 비교되는 우상중 하나이다. 세상에서 '돈'으로 안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2.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 돈과 하나님을 함께 할 수 없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

 

  • 돈의 중독성 : 돈의 정신적인 중독은 돈이 줄어들 때 그 상황이 어렵다면 돈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돈은 가질수록 욕심이 커진다. 돈에 대한 중독은 마약과 같이 금단현상이 수반되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면 안되는 것이다.
  • 투기적으로 이룬 '부'는 정상적인 '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이는 성실함을 우습게 여기는 생각으로 발전한다. 영적으로도 '돈'이 신이 된다면 돈에게 먹히는 삶으로 살게된다.

 

3. 돈을 사랑하지 않을 방법

  • 지금의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만족은 주어진 상황에 마음을 맞추는 것으로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 내가 '가진 것'은 누가 주신 것인가? 바로 절대적 주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5

 

  • 돈에 대한 '필요'와 '욕심'에 대한 구별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만족의 기준은 바로 먹을 것, 입을 것이다. 그 이외는 바로 '덤'인 것이다.
부자가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잠언 23:4-5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리보서 4:12-13

히브리서 13:4

모두 혼인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https://youtu.be/66i7WrX6zrQ

  1. 결혼은 귀한 것

결혼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결혼을 너무 지나치게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결혼을 더욱 어렵게 한다. 특히 나의 능력에 대한 증명, 나의 행복을 위한 결혼,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는 가가 결혼의 이유가 된다면 결혼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서로를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긴다면 오히려 시험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음의 공허함을 상대에게 요구한다면 이는 실망과 미움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렘 2:13에서는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즉, 생수의 근원을 착각한 것이다. 진정한 결혼에서의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 상대의 균형적인 삼각관계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를 상대에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렘 31:32에서는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었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일종의 결혼 언약인데 거기서 파생된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이 어김으로써 언약이 깨어져 버린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바알'을 우상으로 삼은 것이다. 바알의 뜻은 주인이라는 뜻과 남편이라는 뜻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기서 관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고자하는 마음의 '새언약'을 우리와 맺었다. 렘 31:32절에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2.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의 플라톤에서 어거스틴에 이르는 철학에서 '성'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다. 하지만 성경에서 잠자리는 부부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하지 않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창 2:24절에서는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창세기 2:24절 이후부터 '아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잠자리, 성관계는 생명탄생의 수단이다. 따라서 결혼이라는 언약의 테두리 안에서 생명이 가장 안전하게 지켜지는 하나님의 원리인 것이다. 그리고 성관계를 결혼 언약이전에 많이 경험한다면 당연히 만족도가 떨어지게 되고, 이는 이혼의 또 다른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에 대한 경이로움을 깨닫는 다른 이유로 발전한다. 고전 6:18에서는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짖는 다른 모든 죄에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짖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로 이야기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입니다.

히브리서 13:4 후반절에서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것일까요?

로마서 1:24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내버려두심, 하나님의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큰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사생자의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십니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렘 31:34절에 나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은혜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현재 이후부터 거룩하고 깨끗한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내가 상대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돌아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3

(1)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 (2) 나그네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르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3)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https://youtu.be/rWnhPacgxzI

 

마지막 날과 그 때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키는 딤후 3:3에 나와있습니다.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은 문화로 표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비교와 경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롬 12:2에서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시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이야기 하듯, 믿는 사람들의 가정과 교회는 문화를 거스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입니다.

히브리서의 1장~11장까지는 진리의 이야기를 12장부터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진리가 바탕이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통해 삶을 바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표현으로 진리를 아는 만큼 삶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의 진정한 삶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히13:1절은 사랑의 시발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사랑을 지속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조건없는 것으로 마치 가족간의 사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가치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히13:2절은 믿는 나그네를 어떻게 섬길것인가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찾아온 세 천사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게되는 약속을 받게 되었듯, 우리 주변의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0절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과 요한복음 13:34~35절에는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히13:3절은 마음의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중 가장 좋은 것은 이들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공감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려와서 옆에 서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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