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성경사역연구원 미디어팀 입니다.

 

본문 : 창세기 47:22~26

제목 : 창세기 F4(믿음의 사람) 요셉

 

본문

22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암송

창 50:24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1. 골격보기
첫째주절: 요셉이 이르되
둘째주절: 나는 죽을 것이나
셋째주절: 하나님이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 살붙이기
① 요셉이 누구에게 말합니까?
→ 그의 형제들에게
② 하나님이 어디에 이르게 하신다 하십니까?
→ 맹세하신 땅에
③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신 땅입니 까?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④ 하나님이 어떻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십니까?
→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3. 전체암송

1. 하나님이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고백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실 수 있듯이 오늘도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인도해주십니다.









 

해설 및 연구/묵상_오감성경사역연구원 김성찬 목사

 

흔히 요셉을 이야기 할 때, 꿈을 다룬다. 꿈을 가지고 있었고, 해석도 할 수 있었던 사람이기에 그를 꿈쟁이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 그 꿈이 계시록에서도 성취가 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요셉을 꿈꾸는 사람이라고만 하기엔 부족하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으로 이어온 언약의 계대를 이어받은 사람으로 그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언약의 확장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 꿈들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여기서는 이런 관점으로 그의 삶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간단하게 살펴 볼 것이지만 그의 삶을 정리하고 헤아리기엔 충분 할 것이다.

유력한 가문의 11번째 아들인 요셉! 그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형 부를 이룬 사람으로 역대 선조들과는 다르게 많은 부인과 자녀를 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자신을 향한 각별한 애정과 돌봄은 다른 형제들과 눈에 띄게 다른 부분이었고 도드라지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런 요셉은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의 꿈을 꾸기까지 한다. 이것은 오히려 형제들 속에 있는 시기심을 더욱 더 고취케 하는 부작용을 일으킨다(창 37:5~11).

출처 : 위키피디아

불행이다. 부모와의 사랑의 관계가 다른 형제들과 동등한 관계로 결속된 가족의 분위기라면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소개된 대로 단 한 번으로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도약대 역할을 한 것이라면 상당히 억지스럽기 까지 하다. 이것을 야곱이 이삭의 죽음1)을 맞은 후 그가 초래한 비극의 씨앗이라 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면에 보이지 않는 야곱의 요셉/베냐민 편력으로 인한 편애로 당한 상처는, 다른 자녀들 입장으로 해석 될 수 있는 충분한 불만과 아쉬움을 제공하기에 이른다.

1) 성경에 이르면, 이삭은 180세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창 36:28). 요셉이 그의 나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갔고(창 37:2), 그로부터 13년 후 애굽의 총리가 된다(41:46). 그 후 7년의 풍년을 지나 흉년 2년이 지났을 때, 야곱은 식솔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주한다. 그 때 야곱은 130세였다. 결국, 야곱과 요셉이 헤어진지 22년 만에 만난 것이 된다. 이것을 역으로 계산하면, 야곱이 요셉과 헤어졌을 때의 나이가 108세다. 이 때, 이삭이 살아 있었다.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으므로 이삭의 168세 때,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린 슬픔을 이삭도 같이 겪었다는 뜻이 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조금만 헤아리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이삭도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을 적어도 12년 간 함께 했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은, 표현되지 않았을 지라도 더듬어 알면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의 표현은 우리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 동참하시는 것임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연적인 알고리즘으로 야곱의 삶 다음에 다루어져야 할 정도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겠으나 성경은 과감함 생력과 전개로 느닷없이 요셉을 등장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정착한 후, 가족의 일상이 어떤 분위기인지 충분히 눈치 챌 만큼의 정보는 제공한다. 그리고 요셉의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지 알 수 있도록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요셉을 이야기 하며 그것이 곧 한 사건을 일으키는 복선의 역할을 하게 한다. 약 100km 떨어진 곳에 심부름을 보낸다. 하루에 8시간 동안 걷기로 이동한다고 했을 때, 최대 도달거리를 감안하면 최소 3일이 걸리는 거리다. 이삭이 농사로 정착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유목을 유지하며 가계를 이은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양을 치러 그 멀리 떨어진 곳까지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물론, 건기엔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분위기로 추정해 볼 때, 이 시기는 건기일 것이므로 기후조건이 상당히 열악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기꺼이 아버지의 말에 따라 형들에게로 간다. 가는 길을 따져보면 광야를 지나야 하고 골짜기를 가로질러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야곱의 심부름을 성실히 행하는 요셉을 이야기 해준다. 그 심부름이 비극 중의 비극을 초래 할 줄은 아무도 예측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어디 있을까! 돌아올 때가 아닌데 돌아와 한다는 것이 요셉의 옷을 야곱에게 보여주었고 심부름을 보낸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야곱에게 주어진 것은, 형들의 소식이 아닌 피가 묻은 요셉의 옷 조각 뿐 이었다. 절규에 절규를, 절망에 절망을 앉은 야곱은 주저 않아 버리게 된다.

요셉에겐 날벼락이다. 그래도 형제들이고 한 아버지를 둔 자식들 아닌가!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혹독한 현실이었다.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것이 화근이었을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저 겁만 주려 했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단 말인가! 저항에 발버둥을 쳤을 것인데 노예로 끌려가기 까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온갖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그런 그가 ‘상황’을 ‘뜻’으로 인지하고 순응하게 된 것이 언제쯤인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보통 15일 정도의 이동거리를 감안한다면, 약 2주 동안에 인생이 완전 달라진 생각의 전환적인 인도함이 있지 않았다면 노예의 신분이 된 그 자체에 메시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꿈을 통해 22년을 버티도록 만드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성경은 자세하게 소개하고는 있지 않지만, 요셉 그 자신에게 일어난 격변적인 이 일을 수용하는 어떤 전환적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대목이다.

요셉이 아버지 곁에 있을 때는 몰랐을 ‘경험’ 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자집의 유력자로 자란 그가 노예가 되었을 때, 그에게 주어진 생소한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경험은 온실 안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애굽에서 가정총무로 신임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일 처리의 명민함을 보였다면, 야곱이 요셉에게 시킨 교육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뭐 이것이 흐름을 바꾸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한 결과는 의외로 고무적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은 요셉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전부의 표현이다. 극찬이다. 엄청난 것이다.

야곱이 형인 에서를 피해 벧엘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하신 언약의 집약적 표현, 바로 ‘함께하심’ 이다. 그 함께 하심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야곱의 삶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조금 다르다.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심지어 팔려간 신세이며 노예인 그에게 ‘형통한 자’라고 하신다. 우리의 사고와 완전 다르다. 소유와 더 많은 것의 누림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 = 형통’ 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할 정도로 아주 격찬을 아끼지 않는 표현이다. 요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이다.

심지어 감옥에 가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어 ‘형통’함 가운데 살게 하신다. 자본주의 사고로 납득도 안되고 논리적으로 이해도 안되지만, 성경은 격정적인 사건을 두고 아주 덤덤하게 ‘요셉은 형통한 자란다! 봐라~ 하나님이 함께하시잖아!’ 라는 식으로 의식을 깨워주고 있다.

형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로 보았으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다. 우리는 그를 꿈쟁이라고 보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를 형통한 자라 하신다. 애굽 사람은 그를 노예로 보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고 계셨다. 야곱의 사랑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 되어 지금도 함께 하시는 분으로 고백되고 있다. 즉, 상황이 달라져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확신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 그는 곧 형통함 가운데 있는 자라 하겠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성도인 것이다. 비록 납득되고 이해되었을 때, 그리고 최소 조건 이상의 소유가 타인의 평가로 인정될 때, 우리는 ‘잘 되었다!’는 표현으로 형통을 가늠하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아니올시다!

중간에 요셉이 총리가 되고 형들을 만나게 되어 아버지와 극적인 상봉을 이루는 이야기는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라 생략한다. 다만, 후반부에 총리가 되어 흉년의 연차가 더해질수록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전역이 기근에 시달릴 그의 나이 40대에 이르는 어간 쯤, 성경은 그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지 기록하고 있다. 즉, 남은 흉년 4~5년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편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다. 당시의 유력인사들이 요셉 앞에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고, 주변국의 대외 인사들은 요셉의 승인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부모와 자기들이 요셉에게 고개를 숙인 것으로 해석하여 격분하였지만(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더 들여다보면 야곱의 형제국인 에돔과 그의 부족국가들이 요셉에게 절을 하며 원조를 구했을 것을 감안하면 꿈의 적용은 가솔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요셉의 꿈을 소개하고 그 이후에 요셉의 삶을 소개한 성경기자의 탁월함에 고개를 숙여지는 부분이다. 단순히 꿈을 해석하고 대안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하며 자기의 이야기 한 바를 이룬 요셉을 보면, 한 번 말씀하신 하나님은 결코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 없이 성취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사 말씀하신 바가 나에게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이...! 그래서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가 지금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겠다.

야곱은 감동했다. 감격했을 것이며 감탄까지 했을 것이다. 어지간한 지역을 다니며 다양한 문명을 접했지만 애굽은 처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인생 중에 별로 새로울 것도 없을 것이겠지만, 그에게 펼쳐진 노년의 평안함은 약속 하신 그대로 성취 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 그 자체이다. 그래서였을까! 야곱이 축복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받은 복은 장자가 누릴 그 이상의 복이다. 그리고 요셉에게 행한 축복은 넘치고 넘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잠깐 요셉이 받은 축복의 내용을 소개해 본다.

창 49:22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3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26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야곱도 본 것이다. 떨어져 있었지만, 그 시간동안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하시듯, 요셉에게도 함께 하셨었다는 것을 본 것이다. 그래서 감격한 것이고 그의 유언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그에게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가! (‘요셉’이 들어가는 부분에 자신의 이름으로 Self-Blessing 해보자! 그리고 마지막엔 일생의 가장 큰 ‘아멘’으로 결언하자!)

아브라함이 ‘예배자의 자부심’으로, 이삭이 ‘너그러움과 인내’로, 야곱이 ‘약속을 기억함’으로 정리 할 수 있는 인생이라면,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정리되는 삶이다. 세상 끝 날 까지 예배자의 자부심으로 세상을 대할 때, 너그러움과 하늘의 소망을 가진 인내로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바이다.

진행시나리오

 

[활동] I ‘이집트의 왕자 2’ 시청
[준비물] ‘이집트의 왕자 2’ Video
[진행내용]
요셉을 다룬 후, 이집트의 왕자 2를 시청합니다. 편집본을 만들어 주요 부분만 보아도 좋습니다.
주어진 시간 내에 끝까지 보기 힘들 것이므로 주요 부분만 편집하여 보여주고 별도의 시간을 내어 끝가지 시청하는 것을 권합니다.

[활동] 야곱의 축복 II 재현하기
[준비물] 창 49:22~26 / 야곱의 축복 악보
[진행내용]
창세기 49장의 내용으로 서로서로를 축복하고 노래로 Free-HUG로 축복합니다.

분반나눔

 

분반나눔시 주의사항

다그치듯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 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점검하고 짚어주는 시간이며 활동한 내용을 통해 말씀에 대한 이해와 반응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배운 것을 작게라도 활동에 참여한 후에 나눔을 한 것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감정과 느낌을 이야기 하게 됩니다. 짧게 한 마디 하더라도 최대한 칭찬과 격려로 나눔을 이끌어 가시기 바랍니다. 나눔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진행가능하며 유동적으로 접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점검 및 활동내용 소감 나눔] → [말씀을 바탕으로 한 일주일의 각오] → [암송구절 제창] → [축복 기도 후 해산]

1. 자, 다같이 오늘의 본문과 제목이 어떻게 되지?

2. 창세기를 이루는 두 기둥은? ‘B4', 'F4'

3. 창세기를 이루는 두 기중에서 B4와 F4 네 가지는 뭐지?

‘창조’, ‘타락’, ‘심판’, ‘분산’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4.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듣고 가장 기억나는 점은?

5. 최근에 겪은 가장 억울한 일과 그에 대한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그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깨달았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아이들이 억울한 일이 없다고 이야기 할 것을 대비하여 드는 예)

예시 1. 시험공부를 엄청 열심히 했는데, 다음 날 코피가 나서 답안지를 다 버렸다!

예시 2. 게임(대전신, 불멸의 전사 2, 천군, 강철이 제왕 등)을 완전 열심히 해서 거의 최고 수준을 찍었는데 와이파이가 갑자기 끊겼다!(요즘은 무선연결 없이도 많이 하긴 하던데...)

예시 3. 동생이 울고 있을 때, 부모님이 오셔서 갑자기 막 혼내시면서 다그치신다.

6.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장 최근에 느낀 적은 언제인가? 그리고 기억하자! 하나님이 함께 하심 = 형통 이라는 것을!

7. 이번 주, 머릿속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고 마무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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