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현재 가시적으로 확인 가능한 현실 세계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관측된 중력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성경의 역사로 대변되는 창세기 1장 3절부터의 역사가 곧 인류의 모든 역사라고 단언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즉, 1장 2절과 3절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2절의 진행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개념으로는 당시의 ‘공간’의 개념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발견된 중력파1)는 성경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1장 3절부터 나와 있는 천지창조 사건은 그 사건보다도 더 먼저 있었던 어떤 사건, 일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실제로 성경 스스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 있음을 증언한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마귀/사탄 개론’이라고 보면 된다.
1)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모든 작용은 유한한 전파속도(진공 속에서 광속도)로 전해지는 근접작용으로 해석된다. 가령 전자기 작용에 대한 전자기파는 이런 종류의 근접작용을 하는 파동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중력 작용에 대한 파동으로 생각된 것이 중력파이다. A.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의 중력장(정확히 만유인력장)의 방정식에서 장이 약하다고 보았을 경우의 근사법을 써서 진공 속을 광속도로 전파하는 전자기파와 비슷한 중력파의 존재를 밝히고, 쌍성(雙星)의 운동에 대한 중력파의 영향을 논했다. 아인슈타인이 지적한 중력파의 효과는 실제로 관측하기에는 너무 작은 것이었으나, 1974년 J.테일러와 R.헐스의 쌍성펄서 PRS1913+16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중력파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확인되었다. 쌍성펄서의 공전주기는 매년 100만 분의 75초 정도 짧아지고 있는데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이는 중력파에 의하여 에너지가 방출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력파 [gravitational wave, 重力波] (두산백과) 관련 글, Version February 5, 2016 L1600013-v2 https://www.ligo.caltech.edu/system/media_files/binaries/293/original/Press_Release_Korean.pdf?1455063294
먼저 뱀의 존재이다. 뱀이라는 이름으로 사탄이 등장하는 것을 우리는 유의 깊게 보아야 한다. 뱀의 출현 당시에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 하기 이전이었으며 하나님조차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언급하시어 이미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계신다. 그래서 창세기 1~3장에서 등장하는 ‘하나님’, ‘사람’, ‘사탄’의 세 존재를 알고 가는 것이 곧 신앙의 첫걸음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 영적인 세계의 창조를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주전 587이나 586년경에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기록한 내용이다. 그런데 에스겔에게 에스겔 그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이야기’가 “계시”로 주어졌다
당시, 상당한 부를 바탕으로 사치를 일삼고 그로 인한 교만이 가득한 그런 사람들이 이스라엘 북쪽에 ‘두로’라는 나라로 존재했었다. 세계사 입장으로 보면, 페니키아 해변에 위치한 나라인데 그 당시에는 두로가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일부 문헌에 따르면 두로는, 엄청나게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도시 형태로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함락이 되는데, 현재로는 레바논의 해변으로 옮겨져 항구도시로 형성되어 있다.
이런 두로의 모습은 당시나 현재의 자본주의 관점으로 보면, 많은 부의 축적과 누림은 “복받은” 형태라 할 수 있겠다. 즉, 불신앙의 입장에 선 이들이 갖게 되는 시각으로 두로는 성공이며 곧 복받은 사람들이다. 지중해 전 지역의 무역이 그 지역에 집중이 되고 생활 수준은 OECD 최고에 달하는데 어찌 그렇다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을 불러서 세상의 시각으로가 아닌 다른 시각을 계시로 일러주신다.
에스겔 28장 12절에 “인자야”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인자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부를 때 사람의 아들아 그렇게 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래 12절,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그리고 14절을 보자!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여기, “기름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라는 표현을 주목해서 보고(밑줄을 긋든지), 15절을 이어서 보자!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하나님을 두로왕을 위해 슬픈 노래를 지으라고 하시며 말씀하신 비유를 살펴보자! 당시의 두로 왕이 주전 580년, 그러니까 587~588년의 그 정도 사람인데 그가 언제 에덴동산에 살았었겠는가! 즉, 여기서 이야기하는 두로왕은 어떠한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은유”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네가 바로 그 기름부음을 받은 지키는 그룹이다’는 표현으로 은유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룹’은 무엇일까? ‘그룹’은 헤루핍이라는 천사 세계를 그룹이라고 그렇게 말한다. 천사 세계를 성경이 말할 때 이름 없이 그냥 천사라 하는 곳도 있지만 ‘그룹 헤루핍’이라는 천사들의 세계가 실재한다. 이사야서에 보면 ‘스랍’이라는 천사가 나온다. 이들은 전부 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그런 천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등장하는 천사를 언제쯤 창조하셨는가 하는 그런 명확한 기록이 나와있지 않다.
스스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분명히 피조물이다. 피조물이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이다. 그런데 이 피조물을 언제, 어떻게 만드셨는지 인간 창조처럼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래서 기록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 창조하시기는 창조하셨는데, 그중에 천사 하나를 지목해서 어떤 특정 사건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시고 계신다.
특별한 천사, 그 모든 천사 중에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지혜롭고 지위가 높은 천사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천사가 교만하게 되어서 타락을 하는 장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야기이다. 교만한 마음이 들어 ‘내가 하나님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자기 의자를 자기 보좌를 하나님 의자 있는 옆에 갔다 놓아보겠다’는 굉장히 교만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사야 14장에 더욱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12~15절까지인데,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이 부분은 바벨론 왕에 대한 슬픈 노래로 오늘의 본문과 같은 맥락에 있다. 에스겔서 28장은 두로의 왕을 비유할 때에도, 이렇게 힘이 있거나 권세가 있거나 돈이 있거나 지혜가 있거나 해서 교만하게 되면 언제나 비유의 대상을 지칭해두고 있다. 즉, 두로의 왕이 잘 나간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어떤 타락한 천사에 비유하고 있고 바벨론 왕도 교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고 하는 어떤 천사 타락한 천사에 비교하고 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현재의 한국인은 잘 모르는) 하나님의 천사 중에 가장 잘생기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큰 권세를 가지고 있던 자가 교만했다가 타락한 그 이야기는 누구나 어린아이까지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즉, 현재(성경에서의 지금 시점) 어떤 사람을 설명할 때에 이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계시는지 이야기하고자 할 때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옛날 교만했다가 교만한 천사가 타락한 이야기로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애초부터 없던 사람은 없었으니 없어도 되는 생활이 곧 자기의 삶이므로 없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광스럽고 권세가 있는, 아름다우며 부유한 그런 존재가 아무것도 없이 쫓겨나면 그것을 회복하려고 엄청 노력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사탄이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게 되면 무엇을 추구하게 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 권세나 영광이나 부귀나 영화나 지혜나 박탈 당한 채로 쫓겨났다면 그가 추구할 때 그가 원래 가졌던 그것을 다시 추구한단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권세의 세계, 사치의 세계, 명예의 세계 이런 곳에는 언제나 사탄이 개입하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 에스겔서에 나오는 두로의 왕에게 지금 사탄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두로 왕이 세상에서 무역을 해서 잘되고 있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살게 되는데 왜 그렇게 잘 살게 되느냐 왜 그렇게 사치하고 교만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느냐를 본다면, 그 옛날 하나님 나라에서 타락한 그 천사가 천사 마귀가 지금 두로 왕에게 들어와 있게 되면 나타나는 결과 그것이 곧 돈을 끌어모으게 되고 사치하게 되며 권세를 부리를 것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 사탄이 로마라는 나라를 붙잡고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것이 한때는 두로와 바벨론 또 한때는 애굽, 앗수르, 헬라, 로마, 히틀러, 일본의 히로히또 이런 식으로 세계로 돌면서 사탄이 쓸 만한 인물 없나 하며 찾다가 이렇게 해서 사치하고 교만하고 권세 있고 잘 살고 이런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것... 이런 것을 성경은 세상 적이고 정욕 적이고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고 마귀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셔서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그런 길이 있는가 하면 사탄이 들어가서도 이런 악을 누릴 수가 있는 삶이 곧 공존한다는 것이다.
사탄의 세계 귀신의 세계 한 군데만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 12장 3~4절이다.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탄이 타락하면서 저 혼자 타락한 것이 아니고 하늘의 천사들 세계를 삼분의 일을 같이 데리고 타락했다는 성경적 근거이다. 함께 타락한 천사들은 오늘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귀신이라 할 수 있다.
사탄 혹은 마귀라고 하는 것은, “단수”로 되어있다. 최고로 높은 자, 두로 왕에게 해당되는 화강석까지 왔다갔다하던 또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아 하던 것은 ‘하나’이다. 그 하나가 천사 중에 가장 높은 천사인데 그 아래 천사들 중에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수를 데리고 함께 하나님께 반역을 하면서 타락을 한 것, 이것이 곧 성경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가장 무시무시하고 악독하고 독한 것들은 무저갱 속에 가두어 놓으신 것이다(그래서 그렇게 지독한 것들은 여기에 없고 이 땅에 활동하는 악한 영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진짜 믿는가, 가짜 믿는가, 시험할만한 정도의 수준의 것들만 있다고 본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들은 지금도 나오지 못한다. 아주 악한 것들은 어두운 구덩이에 던져져서 거기에 갇혀있는 것이다.
유다서 6절도 보면,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는 표현이 나온다. 확실히 여기를 보면 갇혀있는 것들이 있다. 땅에 나와서 제멋대로 활동이 안 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악한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귀신이 갈수록 악해져서 너무 심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그런 경우가 있으면 가끔 잡아서 묶어다가 무저갱에 집어넣으시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 8장 26~39절에 보면,
26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군대귀신이 ‘무저갱에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한다는’라는 표현이 나온다. 예수님이 무저갱에 들어가라고 하지도 않으셨는데 귀신들이 간구를 하고, 또 그들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다. 예수님은 무저갱 대신에 돼지 떼에 들어가 그 돼지들이 몰사를 한 내용, 조금만 상상하면서 보면 끔찍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놀라운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온전하게 되니까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오시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 있는 귀신들이 시간이 갈수록 악해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선 가지고는 대적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묶어서 수시로 무저갱에 던져 넣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예수님은 그때의 예수님으로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주님이시오 예수님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내신다고,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그런 귀신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참 믿음으로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살면 이기지 못할 것은 없다. 사실 이 땅에는 온갖 귀신들이 가득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기게 해놓으셨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매일 속아서 살지만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거기 이용당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정도 되는 것들만 활동이 허락되어 있다. 극악무도한 귀신들은 일찍부터 지옥에 던져 가두어 놓으셨다. 지금도 수시로 너무 악독한 것,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들은 묶어서 무저갱에 들여보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잔챙이 같은 것들이 무서워서 어두운 밤에 골목도 가지 못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신 일이 없고, 시험당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또한 피할 길도 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리고 더 감사하고 놀라운 것은 우리를 돕는 존재로 천사를 두셨다. 그 수가 귀신들의 수보다 많다. 왜냐하면 타락한 것이 삼분의 일이니까....!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엘리사가 경험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다(왕하 6:8~23 /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오늘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현실 세계 이전에 영의 세계가 존재했다. 그 세계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실재한다. 그 세계는 곧, 악한 영과 천사의 세계이다. 악한 영은 교만하여 타락하였고, 삼분의 일이 같이 타락하였다. 그중의 악독한 것은 이미 무저갱에 가두어졌고 그중의 일부가 현재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이 피조 세계에서 성도를 지키신다. 그들은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이다.
활동
[활동] 창세기 1장에서 네 단어 찾기, ‘하나님’, ‘종류대로’, ‘그대로 되니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준비물] PPT, 창세기 1장
“다음 중,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올까요! ‘하나님의’ 아닙니다. ‘하나님이’입니다.”
다그치듯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 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점검하고 짚어주는 시간이며 활동한 내용을 통해 말씀에 대한 이해와 반응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배운 것을 작게라도 활동에 참여한 후에 나눔을 한 것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감정과 느낌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짧게 한 마디 하더라도 최대한 칭찬과 격려로 나눔을 이끌어 가시기 바랍니다. 나눔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진행 가능하며 유동적으로 접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점검 및 활동내용 소감 나눔] → [말씀을 바탕으로 한 일주일의 각오] → [암송구절 제창] → [축복 기도 후 해산]
자, 다 같이 오늘의 본문과 제목이 어떻게 되지?
영적인 세계는 어떤 곳이지?
그래, 이 세상에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믿기만 하자! 그런데 누구를 믿어야 할까?
성경을 이해하는 많은 접근법들이 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부분은 성경을 쉽고 빠르고 바르게 익힐 수 있는 많은 접근들 중의 하나로 그 어떤 성경 개관보다 강력한 느낌 이상의 무엇인가를 남겨 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 받은 세 가지가 있다. 십계명, 성막, 레위기!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온 후 시내산에 도착하여 받은 것으로 각각 심중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 그중에,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부분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겠다. 그리고 성막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처소요, 그들의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너무나도 중요한 상징가건물이다. 그런데 레위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성경의 한 권인 것은 알겠는데,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와 놓고 본다면 그 의미나 경중함이 다분히 뒤 처지는 듯하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그 의미만 전달되면 레위기가 할 일은 다 한 것이라는 듯, 그렇게 홀대한 것도 다분하다. 또한 지금은 신약의 시대이므로 구약인 레위기를 굳이 언급해가며 강조해야 할 정당성도 희미하다. 오히려 율법서 5권 중에 가장 길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창세기는 상당히 익숙한데, 가장 짧고 제일 간단한 내용들로 가득 찬 레위기가 몇 장까지 있는지조차 모른 채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아니다. 레위기는 그런 책이 아니며 그런 취급당해야 되는 책도 아니다. 말라기서에 등장하는 ‘레위와 맺은 나의 언약’이라고 언급되는 그 언약은 곧, 레위기인데 우리는 너무나도 모른 채 언약의 허울에만 사로잡혀 신기루 안에 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꼭 알아야 하는 책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그런 책으로 여기고 지내며 예수 구원의 영생 속에 이 땅의 기름진 복을 희구하던 것을 반추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맺었던 그 언약, 바로 레위기를 어떤 마음으로 주셨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첫사랑의 아련함과 설렘을 잊은 채, 익숙함과 타성에 젖어 본질을 상실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준엄하고 솔직한 심정으로 깨닫게 하시는 부분이 곧 말라기서에 언급된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레위기를 추억하며 이스라엘을 언약의 회귀로 촉구하고 계시는 것일까? 그것은 레위기의 중요성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후(바울은 홍해를 건넌 것을 이스라엘이 세례 받은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출애굽을 구원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시내산에 도착하여 이제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답을 주는 책이 곧 레위기이다. 그래서 레위기가 곧 구약성경의 중심이 되며 기준이 된다. 구원받은 백성이 구원받은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책이 레위기인 것이다. 삶의 지침과 기준을 제시하는 공식적인 언약이므로 이를 구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구약이라고 했을 때, 창~말을 일컬어 하는 통칭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레위기가 곧 구약인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레위기를 지키면 복을 받는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하지만, 복을 누리는 삶을 살고자 하면 레위기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복의 누림 현상, 26장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레위기를 주신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이 레위기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민족을 이루었으며 이집트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이를 밝혀주고 있는 책이 곧 창세기이다. 창세기를 통해 레위기를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누구로부터 민족을 이루었는지 근원을 밝혀주고 있는 책이 창세기이다.
출애굽기는 말 그대로 이집트를 탈출한 내용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내산까지 도착하여 레위기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역사적 기록이다.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경험하게 된 세세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민수기는 제목 그대로 하면 백성들의 수를 헤아린 기록인데,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광야에서’라는 제목이 있다. 즉,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한 이야기들이다. 무엇으로 왜 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했을까! 레위기대로 가나안에서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은, 실제 살아보기 전에 레위기대로 익숙해지고 체질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기간, 그것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곧 민수기이다. 결론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레위기대로 훈련한 40년간(정확하게 38년이겠으나 통상적으로 40년이라 하겠다.)의 기록, 그것이 바로 민수기이다.
신명기는 계명을 되풀이한 책으로, 말 그대로 계명을 되풀이하고 다시 설명한 책이다. 광야에서 훈을 거의 마친 후, 가나안에 들어가려 하니 문제가 하나 생겼다. 출애굽 2세대에게 레위기를 다시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대를 모압 평지에 모아두고 레위기를 본문으로 세 편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계명, 율법을 다시 한번 상기하도록 한다.
율법이자 구약인 레위기를 중심으로 하여 이렇게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이를 율법서라고 칭한다. 그리고 모세가 기록하였다고 하여 모세오경이라고도 한다. 구약성경의 중심이요, 기준이 되는 이 책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율법이 완성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 율법의 권위와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어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다. 그들이 가나안에서 살면서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가? 바로 레위기이다. 그 자신의 율법이자 민족의 율법인 레위기대로 살아가는 현장이 약속의 땅, 가나안인 것이다. 율법대로의 삶, 레위기대로의 삶이라 하겠다. 그렇게 하루는 레위기대로 살고, 하루는 레위기대로 살지 못하고... 매일의 순간을 기록한 그들이 일 년의 시간을 기록하고 일 년의 시간을 기록한 그들이 일생을 기록하여 레위기대로의 삶을 전해준다. 그것이 곧 역사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역사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기대로 살았는가 살지 못했는가에 대한 천 년의 기록! 이것이 곧 역사서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고 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지만,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율법대로의 삶이었느냐 아니었느냐 뿐이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19장 초반부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며 말씀하시기를 언약을 어길 시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언약을 어기시지 않은 한, 언약을 어기지 않고 끝까지 지켜 행해야 할 입장에 처한 쪽은 바로 언약을 받은 편이다. 그래서 언약, 율법, 약속, 계명,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은 “복” 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레위기 26장에 기록된 복이 그대로 임하게 되고, 어길 시 레 267장에 기록된 저주가 그대로 임하게 되는 삶, 그것이 이스라엘의 삶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보란 듯이 레위기를 져버리고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자기 하나님 삼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에 대하여 하나님은 일언의 망설임도 없이 저주를 내리셔야 함이 마땅하다.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고, 이웃을 해하며, 말씀의 행함이 없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저주를 내리셔서 언약을 이행하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회를 주신다.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뉘우칠 기회를 주신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즉시 저주가 임해야 하는 것이 원래 계약인 것인데, 하나님은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행하지 않으시고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레위기를 기억하라고 하신다. 언약을 회복하라고 하신다. 그랬을 때, 임박한 진노를 면하게 될 것이고 도래한 저주를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한다. 그리고 미리 예견된 하나님의 저주가 곧 임하게 될 것을 알고 그대로 전한 사람들이기에 “예언자”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결국 저주를 받아 흩어지게 되고 멸망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인해 초래한 결과를 상기하여 후대의 교육이 되고자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것이 선지서로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이야기,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기대로 살지 않자, 심판과 저주 전, 징계로써 경고한 사람들의 기록! 이것이 선지서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레위기대로 살지 못하기만 했을까? 아니다! 살았다. 살았을 때, 무엇을 받는가? 바로 복을 받는다! 레위기대로 살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보니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신 지례를 높여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노래와 고백, 지례로 찬양한 것을 모은 책이 바로 시가서이다.
구약성경은 이렇게 레위기를 중심으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덩어리와 같이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율법으로서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설 수 없는 존재임이 구약의 전 역사 속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친히 확인 가능한 존재가 우리에게 나타나사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우리를 원에 이르게 한 법,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겠다.
분반나눔 진행시나리오
[활동] 성경목록외우기
[준비물] ppt 준비(오감성경사역연구원으로 문의주시면 됩니다. 유료구매 필요)
분반나눔시 주의사항
다그치듯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 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점검하고 짚어주는 시간이며
활동한 내용을 통해 말씀에 대한 이해와 반응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배운 것을 작게라도 활동에 참여한 후에 나눔을 한 것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감정과 느낌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짧게 한 마디 하더라도 최대한 칭찬과 격려로 나눔을 이끌어 가시기 바랍니다. 나눔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진행 가능하며 유동적으로 접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점검 및 활동내용 소감 나눔] → [말씀을 바탕으로 한 일주일의 각오] → [암송구절 제창] → [축복 기도 후 해산]
1. 구약성경의 중심, 기준이 무엇이라고?
2. 레위기를 주신 분이 누구이시고 레위기를 받은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근원을 밝혀주고 있는 책은?
3.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내산에 도착하여 레위기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책은?
4.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레위기대로 훈련한 38년간의 기록은?
5. 모세가 출애굽 2세대에 모압평지에서 레위기를 본문으로 한 세 편의 설교는?
6. 이스라엘이 레위기대로 살았는가 살지 못했는가를 천 년의 기록은?
7. 이스라엘이 레위기대로 살지 않았을 때, 심판과 저주 전 징계로써 경고한 사람들의 기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