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간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며 대학생들에게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친 저자는 이스라엘에서 10년째 사역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이스라엘의 작은 땅에서 탄생한 성경은 성서 시대 유대인들의 문화를 알아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린다 성경>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다.
저자는 온누리교회 소속 이스라엘 파송 선교사이며 온누리 이스라엘 베이스 지역 책임자다. 현재 《이스라엘 투데이》에서 편집장으로 섬기면서 문서 사역으로 이스라엘 회복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구독문의: 02-575-1020). 또한 역사·지리·문화를 통해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9일 일정의 <현장체험 성경일독학교> 프로그램을 성지 이스라엘에서 운영하고 있다
저자는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강남 백병원에서 한방과장으로 섬겼으며, 히브리의대 세포생리학 석사 과정과 히브리의대 약리학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홍수로 심판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이루어 가시는 그의 신실함은 인간의 편에서 보았을 때, 긍정의 편도 아니요 부정의 모양도 아닌 오직 그의 말씀 하신 그대로 이루어가는 모양이다. 이미 하시기로 작정된 것은, 모세의 기도와 같은 승부수를 띄우는 기도가 아닌 이상 돌아서지 않는다. 그것이 구원의 계획에서든 심판에서든 동일하다. 인간의 강청으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수정되거나 그의 계획하심이 변경된다고 하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일 뿐이요 역사를 관통하는 신실하심의 내재도 무실 해지게 된다. 이런 세세한 인물의 삶을 추적한 성경이란 결국, 인간들의 자기 고집을 합리화 하여 엮은 이야기 모음이 되는 것뿐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그의 작정과 섭리로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정확하고 신실하게 이루어져가니 말이다. 물론 이쪽 편에 있는 이들에게는 평안일 것이겠지만, 저쪽 편에 있는 이들에게는 이를 갈며 원망을 하여도 돌이킬 수 없는 섭리일 뿐이다. 하나님은 충분한 시간을 주셨으며 언제나 예비한 어떤 인물을 통하여 ‘징조’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홍수도 이와 같다.
이미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은 지면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로 작성 하신 후 한 사람을 통해 그 일을 이루어 가신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노아가 갑자기 등장하여 인물 등장의 전후 구조가 어긋나 보이는 듯해 보이지만 창세기 5장에서 므두셀라의 죽음을 보면 이미 하나님은 그의 선대 때부터 이 땅을 심판하시기로 작정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충분한 기회는 최장수 인간의 삶을 통하여 ‘경고’ 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창세기 7장은 홍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사실적 기사라고 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담는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심판을 이루어 가셨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시는 것과 같다. 즉, 그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신 분이시다.
놀랍게도 그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신 것은, 홍수 심판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독생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서도 드라마틱 하게 전개된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전개되는 그 사건을 하나님은 그의 창세 전 부터의 계획으로 실행하시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보내시는 한 주간의 행적과 죽으시게 된 12시간의 기록, 그리고 부활하셔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는 기록들을 통해 하나님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성취하시는 계획의 위엄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가 머문 3년의 시간 동안 기회는 충분했으며 믿고 따르기에 과분 할 정도의 기적과 이적으로 표적이 되어 주셨다. 즉, 하나님은 이미 그의 계획하심을 이루어 가실 때, 그냥 혼자 조용히 묵묵히 이뤄 가시는 그런 의문스러운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홍수로 심판하신 노아의 때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에도 여하 일반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물이 하도 많아서 산들이 잠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산의 높이가 한국적 정서에서 조금은 받아들이기 힘든 높이다. 보통 42~47.5인 1큐빗을 최대치로 잡아도 50cm인데, 산의 높이가 15큐빗이면 지금의 아파트 3층 높이가 채 안 되는 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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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당시 지리환경이 어떠한지 짐작 해 볼 수 있는 대목이겠지만, 하나님이 그가 행하시는 일을 이루어 가시는 흔적을 더듬어 유추 해 보기엔 너무도 그림같이 펼쳐지는 장면이다. 마치 넓디넓은 평평한 땅에 물이 차 오르기를(물론, 창세기 7장의 기사를 보면 격정적인 수명 상승이겠으나) 차츰 차츰 차 올라 만수가 된 높이가 7.5M가 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왜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실성이 되는 증거인가 하면, 방주의 크기 때문에 그렇다. 방주 길이가 300큐빗이다. 150M 정도의 길이에 너비가 50큐빗이면 25M의 넓은 갑판을 가진 배이며 높이가 삼심 큐빗이므로 15M 정도 되는 상당히 날렵하고 길게 뻗은 네모반듯한 상자 모양의 배가 된다.
생각해보라! 당시 가장 높은 산이 7.5M인데 노아가 짓는 배의 높이가 15M 이면 어지간한 산보다도 높았다는 뜻이 된다. 방주 짓는 기간을 십분 양보해서 최대 40년으로 잡는다면, 기본적으로 설계 잡고, 자재 마련하고, 축조 쌓아서 건조 했다 하더라도 120년은 걸리지 않는다. 약 10~20년이면 지었을 것이고 이만한 시간이면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시고 노아를 통해 행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고 돌이키기에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정도 규모로 지면에 지어낸 방주라면 거의 메소포타미아의 랜드마크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은 그의 신실하심을 온 땅에 드러낸 것이고 노아가 한 층 한 층 방주를 지어 올리는 과정을 통해 계획을 이루어 가신 하나님의 인자한 기회를 누릴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 땅에 쏟아지고 있는 비와 지하수가 터져 온 땅이 분수같이 되는 현장, 게다가 해안가를 쓸어 덮치는 쓰나미, 심지어 불어난 육지의 물이 바다의 만조와 겹쳐 어지간한 평지대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침수 되는 상황에서 노아는 묵묵히 방주에서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수 십 년을 바라보며 무심코 지나쳤던 방주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지한 그 때에서야 생명 부지 수단으로 기어오르려 해 보지만,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앞에 생명을 이어갈 육체는 없었다.
성경은 말하기를, 다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생물들이 어떤 생물이었나! 창조되었을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리라는 복을 받은 피조물들이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 속에서 창조자의 영광이 깃든 만물의 풍성함을 이루는 핵심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맥없이 쓸어버림을 당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없다. 혹자는 말하길, 40일간이나 비가 내렸던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그의 피조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쓸어버리셔야 했었던 창조자의 처절한 애통과 눈물의 양과 비례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그러하든 그렇지 않든, 40일단 내린 물의 양이 온 지면의 생명을 쓸어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 안에서 연명 할 수 있었던 최대의 생존기간을 염두 하신 계산에 의한 날 수라고 본다. 40일 정도의 물이 내려야 충분히 심판이 되고 그 정도 해줘야 나중에 물이 마르는 것을 감안한 재설계를 염두 해둔 것이라 하기도 한다. 기간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피조물을 직접 처리하셔야만 한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기조차 벅찬 아픔인 것은 분명하다. 다 죽었으니까!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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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모든 것과
모든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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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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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일에서는 그 일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거스를 수 없다. 그러므로 기회 주실 때, 그 시간 안에서 충분히 준비하고 누리는 자만이 그의 은혜의 섭리 안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홍수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천천히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준엄한 명령이 되어 마땅히 실행해야 할 사명이 된다면, 우리의 그 준비하고 행하는 과정이 곧 메시지가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분명 이루어져 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천하의 높은 산’보다도 높고 상징적인 ‘방주’가 되어 심판의 대상자들에게 기회로 제공될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골고다의 십자가가 누구나 볼 수 있었던 랜드마크로 그들에게 기회가 되었듯, 우리의 호흡하는 이 순간이 곧 상징이 되어 심판의 대상에서 구원의 대상이 되는 역전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은혜의 삶이 될 것을 기대해 본다.
진행시나리오
[활동] O/X 게임
[준비물] 이면지, 펜
[진행 내용]
본 활동의 목적은 창 6~9장에 있는 홍수 심판의 내용에 대한 잘못된 사실과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해서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방주에서 맨 처음 날려 보낸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약속하셨다’ 등의 내용들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내용들이 사실과 다를 때, 그 내용은 정확하게 인지되는 것을 이용한 게임입니다. 더불어 반의 단합과 일치를 이끌어 냅니다.
창세기 6~9장 내용에 대한 O/X 게임을 진행합니다.
진행 요령은, 반별 대항으로 하도록 합니다.
반의 모든 아이들이 만장일치로 똑같이 들어야 인정됩니다.
만약 야외에서 진행되면 물총을 반의 수 만큼 준비하면 좋습니다.
문제를 내고 O/X 판을 들 때는 문제를 내자마자 ‘하나, 둘 셋! 들어주세요!’ 이렇게 빠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늦으면 상의해서 금방 통일된 답을 들게 됩니다.
각 장을 눈으로 재빨리 살펴볼 시간 1분을 줍니다.
그러고 나서 각 장에서 3~4문제 정도를 냅니다.
야외에서 진행시 선생님들이 물총을 가지고 계시다가 문제를 틀린 반에 물총을 쏘면 됩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모든 반 아이들이 똑같이 맞추어야 인정됩니다. 정답이 O인데 한 명이 X를 들었다든지, X인데 한 명이 O를 들었다든지 하면 무조건 틀립니다. 전체가 다 똑같이!
다그치듯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 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점검하고 짚어주는 시간이며 활동한 내용을 통해 말씀에 대한 이해와 반응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배운 것을 작게라도 활동에 참여한 후에 나눔을 한 것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감정과 느낌을 이야기 하게 됩니다. 짧게 한 마디 하더라도 최대한 칭찬과 격려로 나눔을 이끌어 가시기 바랍니다. 나눔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진행 가능하며 유동적으로 접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점검 및 활동내용 소감 나눔] → [말씀을 바탕으로 한 일주일의 각오] → [암송구절 제창] → [축복 기도 후 해산]
3.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에 대한 두 번째 시간입니다. 사람의 목적이 무엇인가요?"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즐거워하는지에 대해서 배웁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4. 즐거워한다 = 즐거움을 느낄 때는 모든 생각과 마음이 그곳에 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모든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생각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느 8:10절에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라고 합니다.
5.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은 우리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즐거움이십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은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 73:25를 읽어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6. 신 6:5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에서 오직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 바라보지 말고 세상에 속하지 말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만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Dt 6:5)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NIV)
1. 골격 보기SV
1) 주절: 사랑하라
2) 종속절:(어떻게)(누구를)사랑하라
2. 살붙이기(관계) : 혼자 질문하고 답하기
① 너는 누구를 사랑하라고 합니까?
→ 네 하나님 여호와를
② 네 하나님 여호와를 어떻게 사랑하라고 합니까?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서입니다. (Brown-Driver-Briggs 참고 : 외부의 보이는 것으로 가 아니라 특별히 더 강조하고 더 진정성 있는 믿음의 확정을 말하고 있음)
(다시 전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3. 전체 암송(구조)
“주절 → 종속절 → 살붙이기” 순서로 천천히 안 보고 살을 붙이면서 말해보자
그러면 그림이 보입니다. (묵상 그림)
묵상 포인트 (관계 묵상)
정확한 관찰이 바른 해석을 낳고 바른 해석은 이 시대에 적확한 적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적용은 교사님들이나 학생들이 하셔야 합니다.
1. 사랑의 대상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랑의 대상이 인생을 살다 보면 달라지는 모습들을 인간의 삶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한 인간의 타락도 보았고 특별히 하나님이 이 부분을 싫어하심을 알았기에 홍해를 건너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인 것입니다.
2. 사랑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장 인생의 목적에도 나와 있다고 1과에서 말했습니다. 억지로 즐거워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들끼리 가식적인 사랑 표면적인 행위가 그 공동체와 관계를 망쳐놓는 일이 있었습니다. 마땅히 영광 받아야 존재이신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강조하는 것이 가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형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전심(마음, 뜻, 힘)으로 사랑할 대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인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있나요? 인간에 길을 열어주신 기도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창세기를 이루는 두 기둥, B4와 F4에서 B4 세 번째 사건, 홍수 심판이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지구과학적 접근은 물론이고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논의도 상당한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성경을 있는 사실 그대로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홍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느냐에 대한 약간의 이견은 있을지라도 그 자체에 대한 허구성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는 홍수 심판 사건이 실제로 존재했느냐에 대한 초점보다 “심판”의 초점을 두어 다루고자 한다.
먼저 살펴 볼 것은, 심판의 동기와 이유, 그리고 그 방식이 무엇인지 보다 홍수 이전과 지금의 상황이 어떠한지 이중 구조로 제시되는 심판을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홍수 이전과 지금의 상황은 다르지 않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홍수 이전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현상은 타락의 결과요 죄의 결과이다. 그 죄악의 횡행함이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하나님 보시기엔 이 세상의 보편타당한 논리가 무시되는 현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편만한 정당성을 확보하게 될 경우 그것은 집단의 논리가 작용되어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까지 동일시된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논리가 종교화 되고 또 종교적 규칙이 되면 더 이상 깰 수 없는 견고한 규칙이 되어버린다. 가장 간단한 예로, 이슬람에서 4명의 부인까지 둘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만 14세 이상 되는 여자 아이와 결혼하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고 사회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고 하여도 사람의 죄악이 그들 안에 가득하여 문화로 당연시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홍수 심판 시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이 사회를 보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 이전,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보편적인 악의 유발성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주고 있다. 집에서 곱게 자란 아이들이 학교를 다녀오면 거칠어지고 거친 말을 하고 심지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며 충분히 납득 가능한 현상이라 하겠다. 배우지고 않고, 가르치지도 않은 선량함 이편의 현상들은 누구도 교육하지 않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가 학습의 결과마냥 스스로 싸우고,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다투고, 분쟁을 일삼는다. 즉,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그 누누도 정규과정으로 교과서나 교재로 악을 가르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 악함 뿐이라는 것은, 절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심판 이전과 지금의 상황은 여하히 다를 바가 없다.
자, 계속해서 홍수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자!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성경에 ‘세상’을 지칭 할 때, 적어도 4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여기서 ‘온 땅’이라는 표현도 중의적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 전체를 일컫는 동시에 ‘인류’를 지칭하는 문학적 표현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 안에 포악함이 가득하다고 선언하신다. 이미 그렇다는 결론과도 같다. 그런 상태를 하나님은 ‘부패한 땅’이라고 하시고 계신 것이다. 즉, 기능 상실이며 자체 소멸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부패가 화악 작용의 결과로 분자구조가 붕괴되는 현상이겠는데, 요지는 그런 작용이 시작되면 최초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작동해야 할 원초적 기능이 완벽하게 무너지고 제한된 상태를 일컫게 된다. 즉,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피조 세계가 ‘혈육 있는 자’로 대변되는 인류 전체의 붕괴로 인해 전체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사회는 자정작용으로 자가 회복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지상에 모두가 만족하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은 있어도 그것이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부패한 것은 동일하며 ‘포악하여 행위가 선하지 않은 것’도 동일하다. 즉, 사람에겐 소망함을 가질 수 없으며 사람은 그런 존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 사람만이 희망이라 노래했던 시인의 외침이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사회의 자기 논리밖에 되지 않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현상을 ‘부패’ 하였고, 또 ‘부패’한 것이라 말씀하시고 계신다.
9
이것이
노아의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러나 희망은 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서 희망이 아니다. ‘의인’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을 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홍수 심판의 시대,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하셨고, 그를 의인이라 칭해주셨다. 성경은 그가 왜 의인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하는 것이 악함뿐임을 보시고 이 땅을 부패한 땅이라고 하셨듯이, 노아를 당대의 의인으로 칭해주시고 있다. 의의 상대성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따져 볼 것도 없이 당대에 통하는 의가 하나님 편에서 볼 땐, 당시의 절대 의가 되어 의인이 된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은 그를 완전한 자로 여기시는데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에도 사용된 적이 없는 유일의 칭호이다. 에스라서에서 율법에 완전한 사람으로 에스라를 소개하고 있는 것과 아가서에서 왕이 술람미 여인에게 칭한 표현이 있겠으나 존재 자체가 하나님 편에서 완전함을 보였다는 사람은 거의 그가 유일하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였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 또한 셈, 함, 야벳이라는 혈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관없이 없음을 하나님은 덤덤하게 알려주고 계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언제나 그의 뜻과 생각에 합일된 이를 하나님은 의인이라 칭해주신다. 즉, 의인이라 함은 언제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행하는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아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이 그의 마음에 있으므로 이 땅에 부패함이 가득할지라도 의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이 악함뿐인 곳에 더불어 살아갈지라도 그의 의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상황과 지금과 아주 똑같다. 홍수 이전에 누군가는 부패한 세상에 누군가를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언제나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말씀을 딛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언제나 삶을 둘러쳐 있어 하나님의 가족의 한 구성원(막 3:35)으로 살아가는 현장이 믿음이 표현되는 현장인 것이다.
그 때는 노아를 통해 홍수로 심판 하실 것을 준비하셨지만 지금은 교회를 통해 불로 심판 하실 것을 준비하도록 하고 계신다. 그들의 날 수가 백이십년으로 정확한 기한을 두셨듯이, 누군가의 삶이 죽음으로 마감되는 정확한 때가 주어져 있음에는 동일하다. 이미 하나님은, ‘무드셀라’1) 라는 사람을 통해 그의 죽음으로 이 땅에 종말이 찾아 올 것을 예고 하셨으니 어쩌면 하나님 편으로서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셨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이 세상이 심판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고 계신다. 심판이 완료된 상태에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의’ 안에 편입시킨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우리 안에 성취된 것을 발견하게 하신 것이 ‘의’이고 은혜라 하겠다.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온전한 행동으로 결론이 된 것, 이것이 의인됨의 행위이다. 성경이 그에게 의인됨의 칭호를 먼저 지정해 주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행한 것을 소개 한 것을 본다면 우리의 의가 행동에 비롯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먼저인가? 믿음의 반응이 먼저인가? 반응을 보인 것으로 의를 얻는 것인가? 성경의 은혜를 안다면 우리는 그의 ‘의’ 되심으로 말미암아 이 시대의 소명을 이루어 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겠다.
1)활 쏘는 자, 세상을 지키는 자라는 뜻으로 그의 죽음은 곧 세상의 끝을 뜻한다. 즉, 세상을 지키는 자가 죽으면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뜻이 이미 이름 안에 내포되어 그 자체가 계시가 된 것이다. 실제로 홍수 심판은 무드셀라가 죽은 해인 노아 600세에 일어났다.
성경은 ‘물’이라는 것으로 세상이 심판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제는 ‘물’로 심판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심판이 유예된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심판 이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죄악이 관영함과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함뿐인 것과 부패하여 포악함이 가득한 것은 전혀 개선된 부분이 없다. 그러므로 노아를 통해 심판을 면한 기회를 얻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을 면해 영원한 안식의 기회를 누려야 함이 마땅하겠다. 홍수 이전과 이후의 지금의 상황이 여하히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노아에게 주신 기회, 현재는 교회에 주신 것을 기억하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치하여 매 순간 동행하면서 모든 말씀에 ‘준행’ 하는 삶이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 무엇인지, 심지어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한 노아의 삶처럼 그렇게 되기를...!
2. 프로젝터사진을 보여준다. 만들어진 목적은? 크게 보여주는 것이예요. 카메라로 살고 싶다면 존재하는 목적이 없게 된다.
3. 사람이 만들어진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목적이 없으면 자기가 원하는 인생으로 살게 된다. 만들어진 목적을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가 왜 사는지를 깨닫게 된다.
본문
4. 이번시간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에 대해서 배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5.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운 목적에 따라 살아가며 자신이 자신의 삶에 주인입니다. 전2:11을 읽어요! 삶의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익하다고 합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목적과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적 없이 열심히 살아요.
6.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바로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사43:7을 읽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서 지어졌어요.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고전10:31을 읽어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적입니다.
7. 세상 사람들의 목적 vs 그리스도인의 목적 상대주의/나의만족 절대진리/하나님의영광
8. 전2:24을 읽어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기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고후3:5을 읽어요!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세상 어떤 것에도 진정한 만족, 영원한 만족이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어졌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진정한 만족이 있게 됩니다.
기도
9. 요한복음 17:24을 읽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날마다 주와 함께 동행을 하며 주의 영광을 보며 주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은혜를 주소서.
온몸으로 GOGO
1. 환영_출석부 체크 / 과제 및 미션을 점검해 주세요.
나의 인생 목적만들기(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나누고 이야기한다.)
2. 묵상_묵상하면서 기록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본문 : 고린도전서 10:31
암송순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NIV)
1. 골격보기SV
1)주절:하라
2)종속절: 그런즉(조건)다(무엇을)하라
2. 살붙이기(관계) : 혼자 질문하고 답하기
① 너희가 무엇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까?
→ 하나님 영광를 위하여. ,,
② 그런데 어느 순간 까지 입니까?
→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입니다.
(다시 전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두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판단하여야 합니다.
(앞뒤 전체 문맥에서는 이웃에게 전도하는 현장의 판단에 집중하고 있음)
3. 전체암송(구조)
“주절→ 종속절 → 살붙이기” 순서로 천천히 안보고 살을 붙이면서 말해보자
그러면 그림이 보입니다. (묵상그림)
묵상 포인트 (관계묵상)
정확한 관찰이 바른 해석을 낳고 바른 해석은 이 시대에 정확한 적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적용은 교사님들이나 학생들이 하셔야 합니다.
1. 우리가 살아갈 때 판단할 기회가 많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역뿐만 아니라 삶이라는 일상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이웃들과 만나고의 모든 순간들에서 판단하고 결정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전도의 대상자들에게서 또는 고린도교회 내에서 애매한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도 성경에 나오지 않는 여러고민들이 있습니다.
2.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운 목적에 따라 살아가며 자신이 자신의 삶에 주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장 인생의 목적에도 나와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인생의 문제가 쉽게 결정되기도 하고 어렵게 결정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은 우리 모두의 영광으로도 회귀됨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뒷구절들이 이것을 뒷받침 합니다.
(고전 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