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3:14-15

(새번역)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개역개정)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https://youtu.be/L8qROvKG65k?si=7f4NqQd36vwmRbl1

인간의 핵심은 '마음'이다. 마음은 크게 생각과 느낌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생각은 어떠한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고 느낌은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마음의 상태를 긍정과 부정의 스펙트럼으로 펼쳐보면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는 평강, 만족, 감사와 같은 행복의 상태와 우울, 두려움, 불안과 같은 불행의 상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 이끄실까? 당연히 '행복'의 상태로 이끄신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평강과 하나님의 영광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평강과 하나님의 영광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강의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상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평강의 너희에게 주노라' 였다. 따라서 평강과 영광은 믿음이라는 연결통로를 통해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강과 믿음과 영광은 셋트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는 '평강'(믿음/영광)의 상태에 있을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평강은 그 종류와 차원이 다르다. 믿음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강하다면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이 그 반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주중 생활에서 평강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바로 마음의 근심이나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3:14)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다. 따라서 영원한 도시인 천국을 찾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City of God'에서의 도시는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질적인 도시였고 일시적이며, 세상적인, 결국에는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견고하고 영원하며, 궁극적인 도시를 찾아야 하는데 이런 도시를 찾는 사람의 특징은 지나가는 즐거움에 매달리지 않고 '믿음'안에서 진리에 헌신한다. 현재 관심과 걱정에 매몰되지 않고 하늘에 사는 사람의 믿음 상태가 바로 영광의 상태이고 이는 선순환을 이룬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복음 7:38)

마음에 소망의 가치가 채워졌을 때 비로소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믿음의 선순환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히브리서 13:15)

믿음의 선순환이 왜 막히는가? 마음의 중심이 세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육신과 세상의 가치중에서 마음의 중심에 무엇을 두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가지고 있느냐, 소유하고 있느냐의 차이이다. 예를들어 아담은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보다 밖에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자 했다. 이것이 바뀌는 것을 바로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죄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잠언 4:23)

신앙인은 소유하면 안되는가? 아니다 가져도 된다.

아브람은 이집트를 떠나서, 네겝으로 올라갔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서, 모든 소유를 가지고 이집트를 떠났다. 조카 롯도 그와 함게 갔다 아브람은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다. (창세기 13:1-2)

여기서 아브람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중에 소유로 발전한 것이 바로 '이삭'인 것이다. 아브람은 그로 인해 맏음과 평강이 그의 마음에서 사라졌다. 창세기 22장 1절에 '너의 사랑하는 외아들'이라는 표현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3일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의 중심이 바뀌게 되고 결국에는 믿음을 완성하여 평강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처럼 소유욕은 평강의 상태를 깨뜨리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만든다. 소유욕에는 여러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첫번째는 '자기중심성'이다. 이득의 증가를 좋아하지만 반대는 견디지 못한다. 전도서 3장 9절에도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라고 이야기하면서 소유욕으로 안달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유욕의 두번재 특징은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노력을 해야한다는 강박이다. 잠언 16:1에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소유욕을 채우기위해 사람은 좋은 결과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28절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 소유욕이 클수록 세상에 흔들리게 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신앙도 약해지게 된다.

그렇다면 소유욕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3)

마음이 가난하다의 뜻은 소유욕을 내려놓은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반대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채우심을 기다리는 상태를 말한다.

 

히브리서 13:9-13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음식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이 튼튼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튼튼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 규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제단에 놓은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립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리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개역개정)

 

https://youtu.be/BZtq5TQTepw?si=dTMVD2CcN4BjdyyI

  1. 복음의 정체성을 소유하라

안식교의 음식법에서 겔로그의 시리얼(채식주의 식단의 보완)이 탄생했을 만큼 안식교에서는 음식법이 중요하다. 하지만 음식법에 메이게 된다면 삶에서 신앙의 잘못된 태도를 가질 수 있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교만과 같은 율법주의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경계해야 할 점이다.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음식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이 튼튼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튼튼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 규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13:9

본문 9절의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은 유대교의 음식법에 대한 이야기인데 특별히 이를 통해 '거룩'과 구별된 삶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일상이 거룩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 데리고 나온 주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레위기 11:45

신약시대에 와서는 음식법을 지키지 않았다. 음식법은 '거룩'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음식법은 일종의 자전거의 보조바퀴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는 본질(거룩)을 알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거룩의 본질을 알게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음식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음식법을 계속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외에도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거룩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음식법을 포함한 율법을 지킴으로 이것이 '선민의식'으로 발전한다면 이것은 교만이라 할 수 있고, 죄악된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즉, 율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높이고 자존감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나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거룩'이 아니라 바로 복음 즉, '은혜'인 것이다.(히 13:10)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요한복음 6:55-56

진정한 구약의 음식법의 성취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복음의 정체성을 드러내라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립시다.(히브리서 13:11) 대속죄물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림(부정함을 상징)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바로 진정한 속죄의식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3:12)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속죄로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림으로 완성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히브리서 13:13) 예수님의 고난은 '치욕' = 모욕 + 조롱 ; 우리도 그와 같은 치욕을 짊어지자. 믿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자고 이야기한다. 현대에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기독교인의 참된 삶에는 고난과 칭찬이 함께 드러난다. 기독교인으로써의 삶에서 칭찬만 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감내한다면 복음에 대한 정체성은 드러나게 되어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마태복음 5: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 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상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요한복음 12:42-3

삶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믿음인 것이다.

히브리서 13:7-8, 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어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게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젠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개역개정)

 

https://youtu.be/Yu_32FhZAvA?si=qq95Uk6n00Ky9ULT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매일 고민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진리를 듣고 삶에 적용하는 것으로 삶은 그 자체가 은혜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장로를 지칭되는데 여기에는 목사도 포함된다. 장로는 크게 가르치는 장로, 다스리는 장로로 구분된다. 대개 가르치는 장로, 목사는 풀타임으로 사역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스리는 장로는 현업에서 일을 하면서 겸하여 섬긴다. 목양의 입장에서는 둘다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벧 5:5에는 장로에게 순복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5 (개역개정)

 

히 13:7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득의 믿음을 본받으라

히브리서 13:7

 

세상에서 때로는 가족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객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는 교회보다 중요한 공동체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는 영원성을 다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서의 지도자는 중요한 자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가르치는 장로의 경우는 진리를 전한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게 생각해야 하며, 진리가 오염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한다.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때로는 나의 이익을 위해 타협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사람이 싫어할 것 같은 진리를 전해야 하는 부담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10 (개역개정)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야하고 하나님의 뜻이 선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면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하면 안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교회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은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왜 중요한가? 생명과 평강을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선택에서 안전한 방향을 선택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은 다 죽음으로 향해 가는 것이 세상이다. 진정한 의미의 평강과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공급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1. 지도자를 기억하라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히브리서 13:7 (새번역)

 

지도자를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의 수고를 생각하고 감사한다는 뜻이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삶에서 역지사지가 100% 되는 것은 아니다. 육아, 직장생활, 수고를 기억하도록 감사하도록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왜 교회지도자의 수고를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첫번째로 교회지도자도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교회지도자가 제일 힘들다. 성도들도 직장을 다니는데 왜 목회자가 힘든가? 목회가 힘든 이유는 많은 것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은 기준이 분명하다. 손익계산으로 분명하다. 하지만 목회는 그렇지 않다.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 교회 지도자는 내면과 외면이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은 내적상태와 관계없이 일을 수행하면 된다. 운동선수나 음악가들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과 잠자는 시간을 제어한다. 목회자도 그러한 심정으로 살아간다.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진리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지도자의 수고를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인정와 격려를 필요로한다. 이러한 표현은 작더라도 큰 격려와 위로가 되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갈라디아서 6:6 (개역개정)

 

  1. 지도자의 믿음을 본 받으라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히브리서 13:7 (새번역)

당시 지도자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의 결과는 바로 순교였고, 천국이었다. 복음으로 제시되는 선물은 천국에 가는 것이다.

 

 

2. 지도자에게 복종하라

히브리서의 13:7절의 본받으라는 말은 곧이 듣고 복종하라는 이야기이다. 한국교회에서의 가장 안 좋은 모습은 사심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성경을 말씀을 오용해서 순종을 강요하고 복종하게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자식이 물려받다는 이야기로 세습을 이어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사유재산이 아니다. 내가 하는 행실이 옳더라도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사도바울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목회자의 성경적인 권위와 가르침에 복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성경적인 가르침과 명령은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다.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다. 구별이 필요하다. 목회자도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도 성도들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잘 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성도는 권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이다.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을 장차 보고드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3:1 (새번역)

 

가르치는 사람 - 지도자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게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3:17 (새번역)

 

17절 후반에 기쁜 마음으로 탄식하지 않도록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탄식은 고통가운데 나오는 한 숨인데 목회자의 탄식은 은혜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중용의 원리가 적용된다. 목회자들 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탄식하는 목회자, 반대로 너무 많이 받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목회자는 목회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번외로 목회자는 언제 탄식하는가?

예배시간이 시작되었을 때 예배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보았을 때, 성도간의 사랑과 의리를 저버리고 분쟁할 때, 성도의 헌금생활과 같은 성도의 생활이 잘 되지 않을 때

 

교회는 사람이 궁극적인 지도자이면 그 공동체는 희망이 없다. 궁극적인 교회의 지도자는 예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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